시읽는기쁨

아지랑이 / 조오현

샌. 2007. 11. 2. 12:50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 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이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아지랑이 / 조오현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깊은 낭떠러지와 맞닥뜨린다. 거기는 나아갈 길도 물러설 길도 없는 끝없는 허공이다. 거기서 나는 나를 지탱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한다.

 

재물도, 권력도, 하늘로 알고 믿었던 신념도 모두가 손에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일 뿐이었다. 바람 속의 먼지일 뿐이었다. 마른 지푸라기 같은 허망한 것을 껴안고 나는 일생을 씨름하며 살았다.

 

그러나 허공은 허무와는 다르다. 허공은 충만한 '텅 빔'이다. 모든 것의 무가치함 속에서 모든 것의 진실된 가치를 깨닫는 공간이다. 허공은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허공이고 허공이 곧 우리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절망의 밑바닥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희망의 빛, 구원의 복음을 듣게 된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우치다 / 이성부  (0) 2007.11.12
텅 빈 나 / 오세영  (0) 2007.11.10
오늘 / 구상  (0) 2007.10.23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3) 2007.10.17
흰 별 / 이정록  (2) 2007.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