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I was born / 요시노 히로시

샌. 2007. 12. 3. 10:37

틀림없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여름, 아버지와 함께 절 경내를 거닐고 있을 때 푸른 안개 속으로부터 피어 나오듯 하얀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른하고도 차분하게 천천히.

 

여자는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의식하면서도 나는 여자의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리를 밑으로 향한 태아의 유연한 움직임을 배 언저리에서 연상하면서 그것이 이윽고 이 세상에 태어날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소년의 상상은 비약하기 쉽다. 그때 나는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수동'이라는 이유를 문득 이해했다. 나는 흥분하여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 역시 I was born 이군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풀이했다.

- I was born 이야. 수동형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태어나 지는 것이로군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말예요.

 

그때 아버지는 어떤 놀라움으로 아들의 말을 받아들였을까. 나의 표정이 그저 순진한 것으로만 아버지의 눈에 비쳤을까. 그것을 정확하게 살피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문법상의 단순한 발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 하루살이라는 벌레는 말이야, 태어나서 2-3일 만에 죽는다는데 그럴 바에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인지 하고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시절이 있었단다.

나는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아버지는 계속했다.

 

-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어느 날 이것이 하루살이라며 확대경으로 보여 주었다. 설명에 의하면 입은 완전히 퇴화되어 먹이를 섭취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위 부분을 절개해 보아도 들어 있는 것은 공기뿐, 아무리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알만은 뱃속에 소복이 충만하여 홀쭉한 가슴 부위까지 꽉 차 있었다. 그것은 흡사 현기증 나도록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슬픔이 목덜미까지 치밀어 올라온 것 같았다. 차가운 빛의 알이었다. 내가 친구 쪽을 돌아보며 <알이다> 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애달픈 일이구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의 일이었단다. 네 어머니가 너를 낳자마자 그만 세상을 떠나간 것은...

 

아버지의 그 다음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아픔처럼 끊임없이 애달프게 내 뇌리에 꽂히는 것이 있었다.

- 홀쭉한 어머니의 가슴팍까지 숨막히게 가로 메우고 있던 하얀 나의 육체.

 

- I was born / 요시노 히로시

 

문득 우리가 가여운 존재라는 느낌이들 때가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도 모른 채 살고 사랑하고, 그리고 다시 새 생명을 낳는다. 생명의 존엄과 축복을 한 꺼풀 벗기면 그 안에는 생명이 안고 있는 숙명이라고 할까, 낳고지고 하는 생명의 아픔과 애달픔이드러난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갓난 아기를 안은 젊은 여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아기는 겨우 눈을 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어머니는잠시도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어르고 달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내 딸 또래밖에 안되는 젊은 엄마의 애정이 눈물겨울 정도로 지극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슬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란이런 어찌할 수 없는 지극함이란 것을 알 것도 같았다.

 

나는 결코 나 혼자만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태어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다른 생명의 도움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생명 의지는 우리를 쉼없이 사랑하게 만들고, 후손 번식의 책무를 다하게 한다. 그 거대한 순환 법칙을 그려보면막막하고 어지러워진다. 우리는 이럴 때 '신비'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같은 시인의 '생명은' 이라는 시도 있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곤충이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과 수술을 중매한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받는다

 

세계는 아마도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

그러나 서로가 결핍을 채운다고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고

그냥 흩어져 있는 것들끼리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관계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도 허용되는 사이

그렇듯 세계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왜일까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곤충의 모습을 한 다른 존재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군가를 위한 곤충이었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