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타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그리워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의 숙명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아름다움은 동시에 고통을 동반한다. 가슴앓이 없이 아름다움은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그런데 대표적 연시(戀詩)의 하나인 이 시를 짓게 된 배경에 대해 시인은 이런 엉뚱한 말을 했다.
"이 시는 1986년 11월 어느 날 중앙일보 사옥 내 계간 <문예중앙>에 속한 한 빈 책상 위에서 씌어졌습니다. 그 당시 나는 건국대 사태 이후 5공의 탄압 국면이 날로 극성을 부리던 때 어떤 일 때문에 지명수배되어 이른바 ‘도바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낮에는 주로 안전지대인 신문사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잡지사 잡글도 쓰고 하면서 노닥거렸죠. 그런데 하루는 그 신문사에 딸린, 무슨 하이틴 잡지에 근무하는 선배 시인이 <문예중앙> 부서를 지나가다가 문득 나를 발견하고는 “이봐, 황시인! 시 하나 줘. 하이틴이야. 쉽고 간단하게 하나 얼른 긁어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5분 걸렸을까요, 쓰윽 긁어서 줬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독자를 경멸하면서 함부로 써버린, 이 무시받고 망각된 시를 내가 다시 의식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 이듬해 봄이었습니다. 친구 부인이 모 대학가 앞에서 그 당시 불온시 되던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뭣이냐, 너를 기단린다나 어쩐대나 하는 시가 어느 시집에 있느냐고 물어오는 거겼어요. 그게 성우 출신 김세원 씨가 어느 FM 방송에서 낭송한 뒤로 여러 사람이 와서 찾는다는 말을 듣는순간, 나는 얼핏 수치심 같은 걸 느꼈습니다. 2001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그해 8월 서울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날 아침, 차를 몰고 학교로 가다가 나는 한 FM 라디오에서 50년 동안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 역사의 슬픈 객들을 위해 이 시가 음송되는 걸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 매우 객관적인 매체에 의해 들려지는 내 시가 내 귀에 아주 낯설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시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선배의 부탁으로 5분만에 씌어진 시, 시인의 표현대로 하면아무 생각없이 그냥 긁어주었다는 것이 이 시다. 독자를 경멸하며 함부러 써버렸다는 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적 감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고뇌와 갈망이 이 시에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한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였는지 모른다.
'너'가 누구이든 우리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그리움으로 산다. 그러나 사랑하는 나의 님은 내 곁에 없다. 멀리서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만 그것은 희미한 바람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리움 하나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중요한 것은 '너'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너'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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