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샌. 2008. 2. 4. 11:06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한잎의 여자 / 오규원

 

그저께가 오규원 시인의 1주기였는데, 지인들과 제자들이 모여서 추모식을 가졌다는 보도를 접했다. 어느 분이 추모사에서 시인을 가리켜 '누구보다도 언어 자체와 치열하게 싸웠던 시인이자 몸과 마음 모두를 시에 바친 순교자'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기억하는 시인의 작품은아마 이 시 '한잎의 여자'일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는 늘 동경이고 신비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잎의 여자에 대한환상을 품고 있으리라. 시인이 말한 여자가 시인에게는 언어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시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뛰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를 영원히 가질 수 없다. 그런 사실이 도리어 축복이기도 하다.

 

'한잎의 여자 2'와 '한잎의 여자 3'도 같이 읽어본다.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를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는 하나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 한잎의 여자 2 / 오규원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여자, 그레뉼 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 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 같은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감한 여자, 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 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 한잎의 여자 3 / 오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