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샌. 2008. 2. 3. 14:03

한겨울 못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며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모든 사랑은 둘만의 은밀한 고립을 꿈꾼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눈부시면서도 황홀한 고립이다. 일상이 따분할 때 누구나 불현듯 찾아오는 뜻밖의 사건을 꿈꾸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경우라면 얼마나 황홀한 도발이 되겠는가. 사랑은 가슴 짜릿한 음모이며, 예의나 도덕으로부터의 일탈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강원도에 들었을 때 뜻밖의 폭설을 만나 한 사나흘 고립되고 싶다. 그때는 나 또한 헬리콥터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으리.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그리고 난생 처음의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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