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여우난골族 / 백석

샌. 2008. 1. 29. 11:01

명절날 나는 엄마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넛집엔 복숭아 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 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 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族 / 백석

명절을 앞두고 일가친척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계시는 큰집에 모인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집안은 이야기소리, 웃음소리, 아이들의 장난 치는 소리로 시끌해진다. 힘들게 살아도 사람사이의정이 있고, 일가붙이들의 화기애애함이 느껴져 향수에 젖게되는 시다. 이런 광경을 그려보면 정겹고 흥겹고 저절로 가슴이 따스해진다. 바로 먼 과거의 얘기도 아닌 얼마 전까지의 우리네 삶이 이랬다.

다시 설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예전에 비해서는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는데, 뭔가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변해야 하고 앞서가야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슬그머니 우리 곁을 떠나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자꾸만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