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샌. 2008. 2. 13. 11:46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 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이번에 안도현 시인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라는 새 시집이 나왔다. 책 제목이 마음을 끌어서 시집을 샀는데, 작품 중에서 이 시가 눈길을 끈다. 시인은 이미 지나간 것, 사라진것들을 애틋하게 되살려내는 데 탁월한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경상도에서 자란내 경험으로는 "고기 끊어왔다"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각별하다. 그 말 한 마디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정서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누런 마분지에 둘둘 싼 돼지고기, 거기에는 아버지의 헛기침이 분명 따랐을 것이고, 툭 내던지듯 건네며 하는 말, "고기 좀 끊어왔다!" 무뚝뚝하지만 식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이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립긴 마찬가지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 헤는 밤 / 윤동주  (0) 2008.02.24
뻘물 / 송수권  (0) 2008.02.20
나의 가난함 / 천상병  (0) 2008.02.10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0) 2008.02.04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1) 2008.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