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그립다'는 말만큼 정겨우면서 가슴을 울리게 하는 말도 드물다. 그리움은 우리 마음 속의 깊고 심원한 그 무엇에 닿아 있는 정서다. 그리움은 우리가 떠나온 영혼의 고향에 연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리움은 거기에 이를 수도 없고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므로 슬픔이라고 부..

시읽는기쁨 2008.12.26

작은 짐승 /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작은 짐승 / 신석정 시대가 암담하면 서정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가는가 보다. 이 시는 ..

시읽는기쁨 2008.12.23

나의 경제 / 안도현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 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시내버스가 210원 곱하기 4에다 더하기 직행버스비 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 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며칠 후에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 뿐이라는데 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

시읽는기쁨 2008.12.19

시래기 한 웅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를 한 웅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 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시읽는기쁨 2008.12.14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물고기의 눈에는 물이 안 보이고 새의 눈에는 공기가 안 보이고 용의 눈에는 돌이 안 보인다지 꽃이 피면 꽃나무는 안 보이고 열매가 열리면 가지는 안 보이고 아기를 안으면 엄마 아빠는 안 보이지 젊은 가장을 대신하여 독가스실로 들어가 준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도 나치의 눈에는 유태인으로만 보였지 마음은 공기는 우주는 神은 안 보이니까 눈은 너무 작으니까 눈이라고 다 눈은 아니니까 -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을 전부인 줄 착각한다. 물리적으로도 인간의 눈이 보는 것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지 우리는 잊고 산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믿는 것..

시읽는기쁨 2008.12.09

山居 / 徐敬德

花潭一草廬 瀟세類僊居 山簇開軒近 泉聲到枕虛 洞幽風淡蕩 境僻樹扶疎 中有逍遙子 淸朝好讀書 - 山居 / 徐敬德 화담의 한 칸 초가집은 신선이 사는 곳처럼 깨끗하네 창을 열면 늘어선 산들이 가깝고 베갯머리엔 시냇물 소리가 조용하네 골짜기 깊으니 바람이 시원하고 땅이 외지니 나무가 무성하네 그 속을 거니는 한 사람이 있어 맑은 아침 즐거이 독서를 하네 황진이(黃眞伊)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러 찾아간 곳이 이 시에 나오는 한 칸 초가집이었을지 모른다.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키고 자신만만해진 황진이는 역시 명성높은 학자인 화담도 공략하려 한다. 요사이 말로 하면 황진이는 '펨므 파탈' 쯤 되는 여자인 것 같다. 그러나 화담을 유혹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도리어 그의 인품에 반해 버린다. 화담과..

시읽는기쁨 2008.12.06

마른 들깻단 / 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늦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단,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미끄럽다 - 마른 들깻단 / 정진규 고소한 깨보다 들판의마른 들깻단에 더 시선이 가는 나이가 되었다. 젊음의 패기와 욕망도 좋지만 노년의 텅 비워지고 가벼워진 마른 자리도 아름답다. 인생에는 이루어야 할 때가 있고, 비우고 내보내야 할 ..

시읽는기쁨 2008.12.02

이니스프리 호수섬 / 예이츠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 진흙과 욋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고랑 콩밭 일구며 꿀벌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에서 홀로 살리라 거기서 천천히 내려오는 평화를 누리리라 안개 아련히 피어나는 아침부터 귀뚜라미 우는 저녁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별빛, 한낮엔 보랏빛 꽃들의 향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그곳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밤이나 낮이나 항상 호숫가에 철썩이는 물결의 낮은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가슴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 이니스프리 호수섬 / 예이츠 I will arise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

시읽는기쁨 2008.11.26

세상에! 보고픈 당신 / 성기완

세상에! 보고픈 당신 당신이 날 보고프시다면 나는 늘 세상 밖으로 달려가요 당신이 계신 곳은 어디든 세상 밖 세상이 모르도록 깊이 잠든 당신 나는 세상 밖의 남자이므로 세상이 몰라도 당신 곁에 있어요 바로 곁에 꿈이라면 꿈속에 삶이라면 그 속에 보고픈 당신 당신이 날 보고프시다면 언제나 세상이 깊이 잠들죠 세상에나! - 세상에! 보고픈 당신 / 성기완 특정한 어조로 인하여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옛날의 그녀는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늘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독백하듯 내뱉던 그녀의 '세상에'는 리드미컬하면서 맑고 귀여웠다. 시가 인상적인 것은 시의 내용만이 아니라 이런 개인적인 경험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이 시는 '세상에'라는 말 때문에 옛날의 그녀를 생각나게 한다. 그녀에게 보고 싶다고..

시읽는기쁨 2008.11.24

지조론 / 박주택

견딜 때까지 견디게나. 최후의 악이 부드럽게 녹아 인격이 될 때까지. 고통? 견디게나. 편안한 시간이란 쉬 오지 않는 법. 상처가 깊으면 어때. 깊을수록 정신은 빳빳한 법. 생각 끝의 끝에서라도 견디게나. 그 어떤 비난이 떼를 지어 할퀸다 할지라도 벼랑 끝에 선 채로 최후를 맞을지라도. 아무렴! 끝끝내 견디다가 산맥의 지리쯤은 미리 익혀놓은 후 영영 죽을 목숨일 때 바위, 뻐꾸기, 청정한 나무, 뭐 그쯤으로 환생하게. - 지조론 / 박주택 죽비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시가 있다. 느슨하고 나른해지는 정신이 화들짝 놀란다. 좀더 치열하고 깊이 살아야 하는데라는 반성이 뒤따른다. 이 시를 만났을 때 문득 추사의 세한도가 떠올랐다. '歲寒然後知松栢'(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의 진가를 알게 된다). 시인은 ..

시읽는기쁨 2008.11.19

원석/ 정진규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富者 외로움 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 거지... 걸인 - 原石 / 정진규 얼마쯤 세월이 흘러야 나도 시인처럼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슬픔 富者 외로움 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富者라고, 그래서 마음 살림이 넉넉하다고 따스하게 말할 수..

시읽는기쁨 2008.11.15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늦가을을 제일로 숨겨놓은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살아도 살아갈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과일을 다 가져가고 비로소 그 다음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혼자서 다 바라보는 저곳이 영리가 사는 곳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수확이 끝난 빈 들판의 빈 원두막은 모든 것 다 내어주고 참 편안하다. 비어있음의 충만이다. 욕심도 버리고 원망도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빈자리에는 바람이 지나고 하늘이 깃들게 하리. 그러나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사는 사람 많다. 단풍 속으로 들어간다고 모두가 가을을 사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영리'란 무슨 뜻일까? 사람 이름일까? 사전에서 ..

시읽는기쁨 2008.11.11

일신이 사쟈 한이 / 작자 미상

一身이 사쟈 한이 물것 계워 못 견딀쐬. 皮ㅅ겨 가튼 갈랑니 보리알 가튼 슈통니 줄인니 갓 깐니 잔 벼록 굴근 벼록 강벼록 倭벼록 긔는 놈 뛰는 놈에 琵琶 가튼 빈대 삭기 使令 가튼 등에 아비 갌다귀 샴의약이 셴 박희 눌은 박희 바금이 거절이 불이 뾰죡한 목의 달리 기다한 목의 야왼 목의 살진 목의 글임애 뾰록이 晝夜로 뷘 때 업시 물건이 쏘건이 빨건이 뜻건이 甚한 唐빌리예셔 얼여왜라. 그 中에 참아 못 견딜손 六月 伏더위예 쉬파린가 하노라. - 일신이 사쟈 한이 / 작자 미상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인데, 요사이 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 내 한 몸 살아가자 하니 물것이 많아 못 견디겠네. 피의 껍질 같은 작은 이, 보리알같이 크고 살찐 이, 굶주린 이, 막 알에서 깨어난 이, 작은 벼룩, 굵은 벼..

시읽는기쁨 2008.11.07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남편 / 문정희 어느 모임에서 50대 중반을 넘긴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갱년기를 거치면서 성욕을 비롯한 이런저런 욕망들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고, 그 중에는 남편에 대한 기대감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전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

시읽는기쁨 2008.11.03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

시읽는기쁨 2008.10.30

나를 키우는 말 / 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 나를 키우는 말 / 이해인 말이 씨가 된다고 한다. 또, 말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곧 말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둘이 서로 악순환을 하며 돌고, 어떤 사람에게는 선순환을 하며 안사람이 점점 더 풍요로워진다. 마음의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있다. 내가 힘들었을 때, 옆의 친구는 애써 좋은 말과 좋은 생각을 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때는 귀에 잘 안 들어왔는데 지나고 보니 친구의 말이 옳았다. "행복해..

시읽는기쁨 2008.10.24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 김기택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더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지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삼십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

시읽는기쁨 2008.10.23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

시읽는기쁨 2008.10.18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 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울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날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

시읽는기쁨 2008.10.16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생전 처음 가본 나라에 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늙은 밀수꾼모양 국경선 길잡이나 해야겠지요. 고향 사람 아는 사람 데려오는 심부름이나 맡겠지요. 신출내기들이니 쉬운 일이나 시키겠지요. 사자(使者)밥을 먹으면서 떨지 마라 두려울 것 없다 손을 내밀겠지요. 나도 엊그제까진 여기 사람이었다, 담배를 건네겠지요. 그새 그쪽 편을 들면서 우쭐대겠지요. 그래도 지금 당신이 가야 할 나라는 얼마나 친절한 나라냐. 세상에, 어느 나라가 장씨나 이씨 한 사람을 위해 안내원을 보내주더냐.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기행문 한 편 없는 나라가 그 정도 호의는 베풀어야 당연하다지만 그래도 그곳의 우두머리가 그렇게는 못 하겠다, 나라 체면이 구겨져서 안 되겠다 그러면 어쩌랴. 지위고하 막론하고 혼자서 걸어오게 하라, 물어물어 찾..

시읽는기쁨 2008.10.11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지체, 언어장애인 마흔두 살 라정식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 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 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시읽는기쁨 2008.10.06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시읽는기쁨 2008.10.01

식구 / 유병록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 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 하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 식구 / 유병록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을 '먹는 입'으로 표현한 것이 인간의 체통을 깎아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옛날에는 먹는 것이야말로 제일 중차대한 일이었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사람이 '먹는 입'으로밖에 보일 수 없..

시읽는기쁨 2008.09.26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나희덕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 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나희덕 세상 돌아가는 내막을 알면 환멸을 느끼게 될 거라고 했다. 점심 식사자리에서 앞의 동료는 그래도 진실을 알고 행동하고 싶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도저히 마를 것 같지 않은 고드름..

시읽는기쁨 2008.09.19

은근살짝 / 유용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지하 선생께서 나와 인생이란 은근살짝 다녀가는 것이라고 '은근살짝'은 '은근슬쩍'의 전라도 말로 모름지기 인생이란 소리 소문 없이 살다가는 것이 최고라고 자기처럼 시끄럽게(표시 나게) 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특유의 밑바닥 철학을 설파하셨는데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 행상선을 얻어 타고 여러 날째 수심 5,000m 인도양 새벽을 건너고 있을 때 누군가 뜨끈한 이마를 쓰다듬는 차가운 손길이 있어 소스라치며 일어났더니 바다보다 더 넓게 퍼진 하늘에 떠 있던 한 떼의 별무리 은근살짝 내려와 글썽이고 있더라 - 은근살짝 / 유용주 우연히 유용주 시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읽게 되었다. 밑바닥 삶을 절절히 체험한 시인의 글에서는 아픔에 매몰되지 않고 승화된 정신의 깊이가 느껴졌다..

시읽는기쁨 2008.09.16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生覺한다는 건 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싱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뒷 짐 지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옆의 동료가 무슨 생..

시읽는기쁨 2008.09.09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다. 어제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 좋은 계절의 초입에 찾아든 무력감이 또 나를 짓누른다. 운동을 하고 호탕웃음을 쳐봐도 잠시 뿐이다. 그래, 조바심치지 말고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 해! 저 탱탱한 공의 탄력을 닮고 싶다. 발랄하고 경쾌하게, 가볍게 사는 법을 되찾고 싶다. 기대도, 의무도, 저 둥근 공의 속처럼비우고 싶다.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탄력의 나라의 ..

시읽는기쁨 2008.09.04

아파트인 / 신용목

천 년 뒤에 이곳은 성지가 될 것이다 아파트 이 장엄한 유적에 눕기 위해 고된 노동과 아픈 멸시를 견뎠노라고 어느 후손은 수위실 앞에서 안내판을 읽을 것이다 관광 책자에 찍혀 있을 나의 유골을 구겨 쥐고 관리비 내러 갔던 관리소 종교인들이 층층이 잠들었다는 로마의 카타콤 성스럽게 북벽을 차지하고 걸린 사진처럼 하루는 아침 변기에 앉아 몇 미터 높이와 몇 미터 간격으로 차곡차곡 손을 늘어뜨리고 볼일을 보고 있을 아파트 주민들을 생각했다 박해의 축복처럼 뿌려지는 태양 가루 돌의 사막을 나서는 숫낙타의 갈라진 발톱과 마른 혓바닥을 닮은 여인의 얼굴 모래알을 씹는 아이들이 몸마다 칸칸이 멸망을 분양하고 사는 카타콤에 밤이 온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 만찬이 차려지고 간곡함을 거룩함으로 옮겨놓는 시간의 낱장들이 창문..

시읽는기쁨 2008.08.29

이불 한 채 / 유강희

내가 사는 작은 동리 어느 집 대문 앞에 오래된 이불 한 채 나와 있다 이불은 제 몸을 둘둘 말아 모지락스런 세월도 층층으로 골고루 펴 떠받들고 앉아 있었는데 안으로 접힌 주름이 켜켜이 그늘을 만들어 무슨 꽃 자글자글 피우고 있는 게 적이나 내겐 마음 깨끼는 일이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할라치면 어디서 붉은 접시꽃이 걸어와 입을 가로막고 지금 내 앞의 한 채 이불이란 고스란히 저 옛집의 대소사를 올올이 새기고 있을 거였다 첫날밤 족두리 푼 신부의 두근거리는 호롱불 그림자가 다녀갔으리라 그리하여 밤이면 젊은 내외가 서로 살을 섞어 청대 같은 자식도 연년으로 놓았을 거였다 아니면 평생 골골 앓는 사내의 피고름 다 받아낸 한숨 덕지덕지 괸 누더기 꽃자리였거나 혹은, 시어머니 구박에 못 견딘 며느리 속울음까장 자..

시읽는기쁨 2008.08.27

조용한 일 /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조용한 일 / 김사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나뭇잎이 아닌가 싶다. 너무나 흔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색깔이나 모양이 나뭇잎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류마다 잎의 모양이나 색깔이 다르고, 그 미묘한 차이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잎의 부드러운 감촉도 좋고, 실핏줄 같은 잎맥도 예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의 춤은 또 어떤가. 가을 단풍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과 풍경을 연출한다. 나뭇잎은 나무에서 돋아나 평생을 나무를 위해 일하고, 나무의 성장을 돕는다. 물과 공기와 햇빛 만..

시읽는기쁨 2008.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