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뒤에 이곳은 성지가 될 것이다
아파트
이 장엄한 유적에 눕기 위해
고된 노동과
아픈 멸시를 견뎠노라고
어느 후손은 수위실 앞에서 안내판을 읽을 것이다
관광 책자에 찍혀 있을 나의
유골을 구겨 쥐고
관리비 내러 갔던 관리소
종교인들이 층층이 잠들었다는 로마의 카타콤
성스럽게 북벽을 차지하고 걸린 사진처럼
하루는 아침 변기에 앉아
몇 미터 높이와 몇 미터 간격으로
차곡차곡 손을 늘어뜨리고 볼일을 보고 있을
아파트 주민들을 생각했다
박해의 축복처럼 뿌려지는 태양 가루
돌의 사막을 나서는 숫낙타의 갈라진 발톱과
마른 혓바닥을 닮은 여인의 얼굴
모래알을 씹는 아이들이 몸마다 칸칸이
멸망을 분양하고 사는 카타콤에 밤이 온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 만찬이 차려지고
간곡함을 거룩함으로 옮겨놓는 시간의 낱장들이
창문마다 아름답게 내걸린다 이대로
한 시대가 끝난다면
나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 아파트인 / 신용목
"아파트 평수에 얼마나 한이 맺혔는데...' 어제 TV 뉴스에서본, 아파트 불법 확장을 단속하는 데 대한 입주자 반응 중 한 토막이었다.'아파트 평수 늘이기에 한이 맺혔다' - 이 시대 도시인들의 삶을 이만큼 적확히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돈 되는 아파트 장만은 이제 도시인의신앙이 되었다. 그 신앙은 이제 농어촌으로까지 번져 아파트 공화국이라 불러도 좋을 나라가 되고 있다.
아파트를 카타콤 유적에 비유한 시인의 혜안이 날카롭다. 미래의 사람들에게 아파트는 카타콤 만큼이나 불가사의하게 비쳐질지 모른다. 그들은 저 공중에 뜬 시멘트 성냥갑을 얻기 위해 한평생을 고된 노동과 멸시를 견디며 참았던 천 년 전의 순교자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볼일을 보면서 내 머리 위와 밑에서 똑 같은 포즈로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수십 겹으로 켜켜이 쌓여사람들은그들의 신을 찬양하며 아침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메피스토펠리스의 순교자가 되길 기도한다. 일요일에 찾아가는 사원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신을 믿는 이 시대의 순교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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