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이불 한 채 / 유강희

샌. 2008. 8. 27. 13:09

내가 사는 작은 동리

어느 집 대문 앞에

오래된 이불 한 채 나와 있다

 

이불은 제 몸을 둘둘 말아 모지락스런 세월도

층층으로 골고루 펴 떠받들고 앉아 있었는데

안으로 접힌 주름이 켜켜이 그늘을 만들어

무슨 꽃 자글자글 피우고 있는 게

적이나 내겐 마음 깨끼는 일이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할라치면

어디서 붉은 접시꽃이 걸어와 입을 가로막고

지금 내 앞의 한 채 이불이란

고스란히 저 옛집의 대소사를 올올이 새기고 있을 거였다

 

첫날밤 족두리 푼 신부의 두근거리는 호롱불 그림자가 다녀갔으리라

그리하여 밤이면 젊은 내외가 서로 살을 섞어

청대 같은 자식도 연년으로 놓았을 거였다

아니면 평생 골골 앓는 사내의 피고름 다 받아낸

한숨 덕지덕지 괸 누더기 꽃자리였거나

 

혹은, 시어머니 구박에 못 견딘 며느리 속울음까장

자분자분 이겨서 저 비단 위 색색이 수놓은

목단의 꽃잎으로 다시 피워냈을지도 모를 거였다

또 밤에만 활짝 깃을 펴는 공작은 제 깃털의

호사스러운 빛깔에 맞는 울음 한번

제대로 속 시원하게 뽑아내지 못했을 것인데

간밤엔 누가 이승의 고흔 숨 몇 올

머리맡 은가락지처럼 향그러이 풀어놓았는지

 

저 한 채의 소슬한 이불,

살아서 누구보다 외로웠을 영혼 하늘로 모시고

이제는 세상 구경이나 한번 실컷 해보겠다는 듯

장롱 속보다 캄캄한 골목 끝에 나와 있는데

 

이 세상 누구의 슬픔 하나

따뜻한 이불 한 채 되어 덮어준 적 없는 난

그저 행인처럼 무심함을 가장하지만

그 옛집의 대문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하네

 

- 이불 한 채 / 유강희

 

어느 날 골목 끝 대문 앞에 낡은 이불 한 채가 버려져 있고, 그것이 시인의 눈에 띈다. 아마 간밤에 누군가가 숨을 거두었고, 그 이불은 망자의 유품인지 모른다. 시인은이불을 통해 한 사람의 애잔한 삶의 역사를 읽는다. 이불에는 그 사람에 관계된 삶의 애환이들어 있다. 이 시가 공감을 얻는 것은 스산한 인생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스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런 것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의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애지중지하며 함께 하던 것들이 언젠가는 떠나고 잊혀질 것이다. 정겨움도 애틋함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세월은 내가 있던 자리를 흔적도 없이소멸시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해는 뜨고 진다. 인생이란 무엇인가?그 쓸쓸함과 황폐함 위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있다.그것은 하나의 슬픔에게 따뜻한 이불 한 채 되어주려는 마음, 시인이 낡은 이불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하는 그 마음, 연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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