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을 / 송찬호

샌. 2008. 10. 16. 14:04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 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울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날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뭐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 가을 / 송찬호

산비알 작은 콩밭 풍경이 가을의 따스함과 쓸쓸함에 젖게 한다. 오색으로 화려하게 물들어가는 단풍만이 가을 풍경은 아니었다. 콩, 장끼, 노루, 멧돼지, 콩새, 그리고 콩밭 주인이 연출하는 이 조화의 무대가 무척 아름답다. 서정적이면서도 쓸쓸하고, 그러면서도 자연적 삶의 순수함이 잘 그려져 있다. 이제 백도라지 무덤 쪽으로 자꾸 눈이 가는 허리 구부정한 할아버지는 올 소출인 황두 두말 가웃에 빙그레 웃는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벗들과 어울려 욕심 없이 사는 삶이 도시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이 시는 올해 미당문학상을 받았다.

"'가을'은 전통적인 감각과 언어로 가을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미당선생이 지녔었던 언어의 마술을 다시 한번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분위기와 어조에는 백석의 느낌도 있다. 장난기와 천진함도 있다. 또 요즘 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소리와 운율의 미학이 특별한 수준에서 성취되어 있음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대가의 옛날 작품을 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은 복고적인 작품이다. '가을' 속의 가을은 오늘날 비현실에 가깝다. 그것은 현실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현실이 상실한 미학을 복원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