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 김기택

샌. 2008. 10. 23. 12:36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더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지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삼십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 김기택

 

기억속의 소녀와 현실의 아줌마 사이의 괴리에 당황할 때가 있다. 수십 년의 세월과 변화는 우리를 안타까우면서도 당혹스럽게 한다. 여자에게는 성숙일 수도 있지만, 그걸남자는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언제나 맑고 깨끗한 소녀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그녀, 아직도 자신을 잊지 않고있을 거라고 남자들은 착각하기도 한다. 남자의 머리속에서 소녀는 작고 어린 상태에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훌쩍 변해버린 중년의 여인은 크고 슬픈 몸이 되었다.

 

시인 또한 세월의 무상함 앞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쓸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시인의 환상을 깨뜨린다. 과거의 환상이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은 유아기적 몽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유아적 몽상으로 인하여 시가 태어나고 그리움이 솟아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어차피 세상은 우리의 주관성으로 채색되어 있지 않은가.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그 때문이며,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위대한 착각이다. 착각은 바보같이 어리석을수록 감미롭고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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