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샌. 2008. 10. 18. 09:58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장정일의 이미지와 이 시는 쉽게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게 장정일이 쓴 시가 맞아?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장정일의 모습은 허상일지 모른다. 세상의 소란에서 한 발 물러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고 싶은 마음이 어찌 장정일 한 사람만의 바람이겠는가.

 

사철나무는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아니다. 느티나무처럼 편안히 낮잠을 즐길 그늘이 없다. 그런데도 시인이 사철나무 그늘을 말한 것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무엇을 강조하려 한 것은 아닐까. 늘 푸르름을 지키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철나무의 속성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있는 것 같다.

 

나에게도 언제나 찾아가 쉴 수 있는 사철나무 한 그루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온갖 스트레스와 시름, 그 품에 들면 스르르 녹아내릴 것이다. 내 안에 그런 싱싱한 사철나무 한 그루 자랐으면 좋겠다.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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