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가본 나라에 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늙은 밀수꾼모양 국경선 길잡이나 해야겠지요. 고향 사람 아는 사람 데려오는 심부름이나 맡겠지요. 신출내기들이니 쉬운 일이나 시키겠지요.
사자(使者)밥을 먹으면서 떨지 마라 두려울 것 없다 손을 내밀겠지요. 나도 엊그제까진 여기 사람이었다, 담배를 건네겠지요. 그새 그쪽 편을 들면서 우쭐대겠지요. 그래도 지금 당신이 가야 할 나라는 얼마나 친절한 나라냐. 세상에, 어느 나라가 장씨나 이씨 한 사람을 위해 안내원을 보내주더냐.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기행문 한 편 없는 나라가 그 정도 호의는 베풀어야 당연하다지만 그래도 그곳의 우두머리가 그렇게는 못 하겠다, 나라 체면이 구겨져서 안 되겠다 그러면 어쩌랴. 지위고하 막론하고 혼자서 걸어오게 하라, 물어물어 찾아오게 하라, 모년 모월 모일 모시까지 당도 못 하면 오도 가도 못 하게 하라 그러면 어쩌랴.
어여뻐라, 한양성 가는 방자처럼 걸어서 날 찾아오는 사람. 아니면 어이 가리너. 혼자서 어이 가리너,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칠흑의 어둠 속에서 열나흘은 흐느끼겠지. 어이 가리너, 이정표도 없는 길을. 울부짖으며 맨발로 내닫겠지. 생각느니, 안개 속 구만리 벼랑길로 나를 데리러 오는 그이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가. 그 먼 길을 오토바이도 없이 걸어서 오는 사람.
-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이런 저승사자를 만난다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 검은 옷을 입고피를 흘리며 사자를 잡으러 오는 무서운 저승사자의 이미지를 시인은 180도로 바꿔 놓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왜곡된 저승사자의 이미지를 만들지 않았는가 싶다. 피안의 세계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미지의 땅에서 오는 나그네들이 지상에서 태어나는 갓난아이들이 아닌가.그렇다면 그 세계는 천진하고 순수한 세계임에 분명하다. 그 세계로 안내하는 저승사자도 이렇듯 어여쁘고 착하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윤제림 시인은 무겁고 심각한주제를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얘기한다. 이 시는 신작 '그는 걸어서 온다'의 표제시다. 피식 웃게 만드는 그의 시를 읽으면 무거웠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 시도 생에 집착하는 우리를 일순 낯설게 한다. 이 나라는 좋고 저 나라는 무섭고 나쁘다고 누가 가르쳐 준 것이지?
시집의 맨 마지막에는 이런 시도 실려 있다.
내가 가도 되는데
그가 간다
그가 남아도 되는데
내가
남았다
- 사람의 저녁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2) | 2008.10.18 |
---|---|
가을 / 송찬호 (0) | 2008.10.16 |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0) | 2008.10.06 |
가재미 / 문태준 (0) | 2008.10.01 |
식구 / 유병록 (0) | 2008.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