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식구 / 유병록

샌. 2008. 9. 26. 12:26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 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 하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 식구 / 유병록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을 '먹는 입'으로 표현한 것이 인간의 체통을 깎아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옛날에는 먹는 것이야말로 제일 중차대한 일이었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사람이 '먹는 입'으로밖에 보일 수 없는 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풍요의 시대에도 먹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쩌면 가장 거룩한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가족이 한 밥상에 앉아 오순도순 식사를 하는 풍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식구라는 말이 예전과는 달리 더없이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평상시에 식구는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맛일 수도 있다. 늘 마주 대하는 얼굴이니 새로움이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식구는 서로가 한 몸임을 알게 된다. 마치 한꺼번에 달려드는 몇 쌍의 젓가락처럼도움을 주려 하고 고통을 함께 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핏줄의 인연이며 본능이다. 아내가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다. 평소에는 접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태도를 보면서한 식구로서의 인연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끼고 있다. 식구란 공기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너무 소중해서 도리어 평소에는 그 가치를 잊고 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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