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나희덕

샌. 2008. 9. 19. 14:57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 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나희덕

 

세상 돌아가는 내막을 알면 환멸을 느끼게 될 거라고 했다. 점심 식사자리에서 앞의 동료는 그래도 진실을 알고 행동하고 싶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도저히 마를 것 같지 않은 고드름 달린겨울 빨래가 마르듯 역사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진보해 나가는 게 맞을까? 아니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걸까?

 

사실이 어떻듯 우리는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이 힘든 겨울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나의 삶도 다르지 않다.눈은 열리지 않고 길은 여전히 어둠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꽁꽁 얼어있는 겨울 빨래도 연약해 보이는햇빛에 의해 서서히 마르고 있다. 찬 바람과 고드름이 햇빛의 따스한 힘을 막을 수는 없다. 힘들고 답답할때면 이 시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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