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은근살짝 / 유용주

샌. 2008. 9. 16. 12:51

한 방송 프로그램에 지하 선생께서 나와 인생이란 은근살짝 다녀가는 것이라고 '은근살짝'은 '은근슬쩍'의 전라도 말로 모름지기 인생이란 소리 소문 없이 살다가는 것이 최고라고 자기처럼 시끄럽게(표시 나게) 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특유의 밑바닥 철학을 설파하셨는데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 행상선을 얻어 타고 여러 날째 수심 5,000m 인도양 새벽을 건너고 있을 때 누군가 뜨끈한 이마를 쓰다듬는 차가운 손길이 있어 소스라치며 일어났더니 바다보다 더 넓게 퍼진 하늘에 떠 있던 한 떼의 별무리 은근살짝 내려와 글썽이고 있더라

- 은근살짝 / 유용주

우연히 유용주 시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읽게 되었다. 밑바닥 삶을 절절히 체험한 시인의 글에서는 아픔에 매몰되지 않고 승화된 정신의 깊이가 느껴졌다. 책상머리에 앉은 머리에서만 나온 간지러운 글이 아니었다. 삶과 일치하는 글, 자신의 치열한 체험에서 나온 글이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힘이 있었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된 것은, 참된 글은 역경속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이 시 '은근살짝'은 산문을 읽던 분위기와는 또 다르다. 고주망태라는 별명을 듣는 술꾼이지만 마음 밑바탕에 이런 감성이 있으니 시인이라는 칭호를 듣는가 보다. 그나저나 은근살짝이라는 말이 참 감칠 맛이 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서 은근살짝 연애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마음 넉넉한 시인은 그래 맞다며 맞장구를 쳐줄 것만 같다.

책에는 이런 재미있는 시도 소개되어 있다.

여기 서해에는 바람 아래나 파도리 어은들 같은 아주 작고 포근한 바닷가 마을이 많은데요 간기가 푹 밴 어리굴젓이나 게장처럼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짭조름한 이야기가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하지요 밭고개에 사는 조개눈과 화등잔도 평생을 갯바닥과 간사지 땅을 부쳐 먹고 살아온 흙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이 양반들이 젊었을 때 농사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농한기에는 샘을 파서 먹고 살았는데 아 그때야 지금처럼 좋은 기계도 없었고 순전히 삽으로 땅을 파서 도르래로 끌어올리고 난 뒤 노깡을 묻는 것으로 인근 동네에 우물이란 우물은 모두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 그런 대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기도 했다구요 화등잔이 어두컴컴한 굴속에서 흙을 퍼서 담아놓으면 조개눈이 마치 불알 터진 이처럼 호이나 흐이나 잡아당겨 이틀 할 일을 보통 사나흘로 늘려 주인 쪽에서 보자면 참 속 터진 일도 많았겠지만 막걸리 두어 되 사는 걸로 웃고 넘어갔다고 해요 그러나저러나 화등잔도 나이가 들어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집안 고모 되시는 분이 중매를 서 얼굴도 모르는 신부와 초례를 치른 다음 첫날밤을 맞게 되었는데 조개눈과 달리 괄괄한 화등잔이 아무리 삽을 들이대도 새암을 못 찾는 거라 구멍 뚫고 이슥토록 침을 삼킨 마실꾼들도 거의 돌아간 뒤까지 온갖 방법을 다 찾던 화등잔이 그만 뒷문을 뻥 차고 나오면서 고자다 고자여 속았구나 속았어 큰소리를 쳤다는구만 동네 시암을 있는 대로 다 팠는데 어찌 자기 각시 시암을 파지 못했을꼬 이튿날 시엄씨와 중매를 섰던 고모가 둘러앉은 방에서 신부의 옷을 벗겨놓고 제품 검사를 했는데 거 숲도 무성하고 계곡도 깊어 물 나오는데는 아무 이상이 없는 거라 시엄씨가 엉덩이를 높이 들거라 고개를 잔뜩 꼬아 마지막 검사를 하고서 윗구멍 아랫구멍 제대로 뚫렸고 아무 이상이 없구먼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 말씀이야 하기사 아무리 눈구멍이 얼굴 반을 차지하고도 남는다는 화등잔이지만 껌껌한 방에서 그것도 숫총각이 숫처녀의 새암을 찾기야 어디 쉽기야 했겠는가 그 말을 듣고 조개눈이 거 부사리처럼 성질만 급해서 원 늘상 불알 터진 벼룩처럼 천천히 파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한바탕 웃고 말았지요 지금 화등잔 양반 아들 셋에 딸 다섯 팽팽히 퍼 올려놓고 세상 좋아진 탓에 샘 파는 일 벌써 정리해고당했다고 궁시렁 꼼지락 고샅길을 휘휘

- 조개눈과 화등잔 / 유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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