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을 억새 / 정일근

샌. 2008. 10. 30. 14:39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 가을 억새 / 정일근

 

매일 아침 메신저로 시를 보내주는 동료가 있다. 오늘은 때에 맞게 이 시를전해주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하루의 시작이 즐겁다. 디지털 시대의 편리한 혜택이 이렇게 기쁨을 주기도 한다.

 

가을에는 이런 고전적인 이별 풍경에 젖어보고도 싶다. 흑백사진 같은 시골 기차역에서 흰 손수건 적시는 이별의 장면을 만나고 싶다. 싸구려 사랑과 헤어짐이 판치는 시대에 오래 삭은 된장 같은 진솔한 작별을 보고 싶다. 디지털 시대에는 눈물도 사치품이 되어 버렸다. 애인도 물건 버리듯 쉽게 보내고 아쉬움 없다. 졸업식장이나 송별회 자리에서는 이젠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축축하고 따스한 그 무엇이 빠져 있다.

 

그대와 헤어질 때는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을 흘리고 싶다. 그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을 가슴 저미게 바라볼 것이다.아, 이 가을에는 그런 작별을 하고 싶다. 그런 인연을 맺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