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남편 / 문정희

샌. 2008. 11. 3. 13:37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남편 / 문정희

 

어느 모임에서 50대 중반을 넘긴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갱년기를 거치면서 성욕을 비롯한 이런저런 욕망들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고, 그 중에는 남편에 대한 기대감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전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와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 관계로 힘들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남편을 인정하게 되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남편 모습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이웃집 아저씨에 비유했다.그만큼 편안해졌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따뜻하고 행복해 보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의 미덕은 세월의 연륜에 따른 인간적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마음자리의 담백하고 텅 빈 아름다움이다. 그러면 부부도 한층 더 승화된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그녀의 말처럼 배우자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하게 느껴지고,부부는 좋은 친구 사이로 변해간다.상대방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 젊었을 때처럼 안달복달하지 않으며, 사랑은 소유나 집착이 아님을 저절로 터득한다.

 

두 마음이 한평생을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고 상대방의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틀을 부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면서 자신의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성숙된 부부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리저리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