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 염소와 풀밭 / 신현정
말뚝에 매인 것이 염소만은 아니다. 누구나 이 시를 읽으면 자신을 염소에 대입시키게 된다. 줄의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말뚝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사실을 비관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에게 주어진한정된 범위의 삶을 즐기고 자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 안의 풀이 나의 것이듯, 원의 안쪽을 지나가는 구름이며, 새들 또한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이런 행복이야말로 소중하다. 본질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하랴. 우물 안 개구리 마냥 말뚝에 매인 사실 조차 모르고 현실에 매몰되어 사는 것이 행복일 수 있을까? 작은 창 하나에 만족하는 삶이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줄을 끊고 초원을 자유로이 내달리는 염소를 상상하면 더욱 그렇다. 시인의 마지막 말 "그러하냐"라는 말이 주는 여운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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