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2

진경산수 / 성선경

자식이라는 게 젖을 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새끼라는 게 제 발로 걸어 집을 나가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 아버지 돈 그래서 돈만 부쳐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글쎄 어느 날 훌쩍 아내가 집을 나서며 - 저기 미역국 끓여 놓았어요 - 나 아들에게 갔다 오겠어요 나는 괜히 눈물이 났다 이제는 내 아내까지 넘보다니 - 이노무 자슥 - 진경산수(眞景山水) / 성선경 - 아들 유머 시리즈 1 낳았을 때 1촌, 대학 진학하면 4촌, 군대 갔다오면 8촌, 결혼하면 사돈의 8촌, 외국에 있으면 해외동포 - 아들 유머 시리즈 2 사춘기가 되면 남남, 군대 가면 손님, 장가 들면 사돈 - 아들 유머 시리즈 3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 진 아들은 내 아들 -장가..

시읽는기쁨 2010.08.20

미루나무 붓글씨 / 공광규

시냇가 미루나무 여럿 들판 캔버스에 그림을 그립니다 바람 부는 날은 더 열심히 그려댑니다 곧은길만 가기 어려운 사람 발걸음을 생각해 논둑과 밭둑과 길은 휘어지게 그리고 높이 떴다 지는 둥근 해가 다치지 않게 산 능선을 곡선으로 그립니다 미루나무도 개구쟁이 아이를 키우는지 물감통을 들판에 확! 엎지를 때가 있습니다 미루나무도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이 되면 붓을 빨러 냇물로 내려가다 뒹구는지 노란 물감을 하늘에 뿌리거나 언덕에 물감을 흘려놓기도 합니다 미루나무의 실수는 천진해서 별이나 풀꽃이 됩니다 이런 미루나무도 심심한 날이 있어서 뭐라 뭐라 허공에 붓글씨를 쓰기도 하는데 나는 어려서 꼭 한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광규야, 가출하거라." - 미루나무 붓글씨 / 공광규 미루나무나 포플러는 내가 어렸을 때만 해..

시읽는기쁨 2010.08.14

붉고 푸른 못 / 유용주

나무는 땅에 박힌 가장 튼튼한 못, 스스로 뿌리내려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만신창이의 흙은 안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다스린다 별은 하늘에 박힌 가장 아름다운 못, 뿌리도 없는 것이 몇 억 광년 동안 빛의 눈물을 뿌려댄다 빛의 가장 예민한 힘으로 하느님은 끊임없이 지구를 돌린다 나는 그대에게 박힌 가장 위험스러운 못, 튼튼하게 뿌리내리지도 아름답게 반짝이지도 못해 붉고 푸르게 녹슬어 있다 소독할 생각도 파상풍 예방접종도 받지 않은 그대의, 붉고 푸른 못 - 붉고 푸른 못 / 유용주 유용주 시인은 처음에 산문으로 알게 되었다. 어느 잡지의 최근호에서 시인의 감칠 맛 나는 글을 다시 만났다. 이건 유 시인의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시인의 산문은 개성이 있다.소녀적 감성이 들어 있는 글에는 삶에 대한..

시읽는기쁨 2010.08.07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

시읽는기쁨 2010.08.02

최후 / 이상

능금한알이추락하였다. 지구는부서질만큼상했다. 최후. 이미여하如何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 최후 / 이상 조영남 씨 덕분에 이상 시를 모두 읽어 보았다. 그 기념으로 이상의 시 한 편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상 시는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난해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어렵게 시를 쓰는지 아무리 이쁘게 봐주려 해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천재와 범인의 차이란 말인가. 어찌 되었든 이것이 이상의 시 중에서 가장 짧다. 그리고 시어도 이상답지 않게 얌전하다. 그래도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능금한알이추락했다. 지구는부서질만큼상했다.'라는 구절은 멋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무슨 뜻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말이라도 이상이 하면 어려워진다. 아니..

시읽는기쁨 2010.07.26

부도덕하게 살거다 / 손현숙

머리 실핏줄이 막혀서, 하도 기가 막혀서 덜컥 누워버린 늙은 엄마, 늙은 아버지가 병문안 오면 슬쩍 눈 흘기면서 대놓고 “가소, 마”한다 그리고 곧이어 “부도덕한 늙은이!” 혼잣말인 척 짐짓, 다 들리도록 중얼거린다 천 번도 더 들은 저 말, 삼강오륜으로 중무장한 우리엄마는 지금 입만 살아서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있지만, 평생 부도덕했던 우리 아버지 팔순을 넘기고도 정정하게 훠이 훠이 세상 끝까지 마실 다닌다 나, 이제부터 무조건 부도덕하게 살거다 도덕 찾다가 늙어, 어느 날 뒷목 잡고 넘어가느니, 요놈의 사탕 같은 세상 실컷 빨면서 들통 나지 않게 시치미 딱 잡아떼고 치맛자락 살살 흔들면서, 살거다 부도덕한 늙은이! 그 누가 뭐라 뭐라 씹어도 끄떡없는 아버지, 지금 엄마 등 쓸어준다 발 닦아준다 에그그..

시읽는기쁨 2010.07.15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들짐승과 날새 흘러가는..

시읽는기쁨 2010.07.11

내가 대통령이면 / 김해자

큰일은 절대 하지 않으리 정권 바뀔 때마다 뒤집어엎는 백년지대계 같은 일에 손대서 안 그래도 어질어질한 우리 아이들 갈팡질팡 비틀대지 않게 하리 다만 아주 작은 것,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작고 작아 티도 안 나는 일 몇 가지는 해야지 교실마다 황토빛 은은히 도는 커튼을 치고 향나무 침대 몇 개 두어 쉬는 시간에 아이들 쉬어가게 해야지 졸려서 눈꺼풀이 내려앉는 아이들 몇 분이라도 허리 쫙 펴게 글자로 하는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들은 들로 밭으로 쏘다니게 해야지 가만히 누워 하늘 올려다보게 가만히 앉아 이슬 한 방울 바람이 흔드는 쑥잎 하나 가만히 들여다보게 들여다보다 들여다보다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쑥부쟁이 되고 개미가 되고 흙이 되고 하늘이 되고 야생 고양이 되고 바람이 되고 바람과 하늘의 영혼으로 ..

시읽는기쁨 2010.07.08

어떤 비대칭 장단 / 권순진

어느 보험회사 직원들의 멀리 소풍 갔다 돌아오는 길이다 방향이 같은 김 과장과 이 여사가 카풀로 동승했고 박 여사도 이웃인 강 대리의 승용차 옆자리에 올라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둑하게 서쪽 하늘이 물들 듯 피곤이 내려와 앉았다 김 과장은 깍듯하고도 나긋하게 '좀 쉬었다 갈까요?' 옆자리의 이 여사에게 쿡 말을 건넨다 이 여사는 잠시 뜸을 들이나 했는데 상큼하고 쿨하게 대꾸한다 '그러죠 뭐' 힘을 받은 차는 가야 할 길이 분명하다는 태도와 순간의 가속으로 '늘봄모텔'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차 어서 돌려요' 비슷한 시간 강 대리 역시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쉬었다 갈 요량으로 박 여사에게 공손한 제의를 했다 하지만 젊은 호흡으로 단호히 '잠시 쉬..

시읽는기쁨 2010.07.03

형을 그리워하며 / 박지원

우리 형의 얼굴은 누구를 닮았던가요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형을 보곤 했지요 오늘 형이 그리운데 어디 가서 볼까 하다 옷매무새 바로 하고는 시냇물에 비춰봅니다 -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을 그리워하며 / 박지원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上 - 燕巖憶先兄 / 朴趾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뛰어난 산문을 썼지만 시는 별로 남기지 않았다. 이 시는 형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것으로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연암은 4남매 중 막내였는데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형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았던 것 같다. 그 형이 연암의 나이 51세 때에 세상을 떴다. 연암은 형이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연암 골짜기의 물가에 앉아 이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연암은 가족과 함께 개성의..

시읽는기쁨 2010.06.25

하급반 교과서 / 김명수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 하급반 교과서 / 김명수 참여연대 앞의 거리가 연일 보수단체의 시위로 시끄럽다. 천안함 조사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며 참여연대가 유엔 안보리에 서한을 보낸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북한을 제재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에 딴지를 걸었다는데서 분노를 느끼는 모양이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자신과 ..

시읽는기쁨 2010.06.21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상처를 얘기하는 복 시인의 시 중에 ‘탱자’가 있다. 밖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난 가시로 인해 찔리고 상처받으며 살아내고 있는 탱자를 그리고 있는 시다. 탱자의 살갗은 제 가시로 저를 찔러대고 할퀸 수많은 상처투성이다. 스스로를 찌르는 자해의 가시로 인해 노랗게 익은 탱자는 더 향기..

시읽는기쁨 2010.06.15

꽃기름주유소 / 고경숙

얼었다 녹은 봄날 산벼랑 백설기처럼 푸슬거리는 산옆구리를 쥐고 달린다 포장을 마다하고 일부러 견고하지 않은 길은 덜컹이며 바람을 타다 오르막에서 멈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온지 한참, 고갯마루 작은 주유소엔 대형 탱크로리에서 꽃무더기를 옮겨 담고 있다 고객님 얼마나 넣어 드릴까요? 나는 L당 가격표를 보는 대신 꽃향기를 맡아본다 들꽃유로 가득이요 서둘러 주유기를 꽂고 뒤차로 간다 내 뒤 봉고는 콩기름을 주문한다 주유원이 탁탁 엉덩이를 치면 꽃향기를 내뿜으며 부릉거린다 카드전표로 가져온 꽝꽝나뭇가지에 손도장 꾹 눌러주고 출발! 손님, 내리막길은 무동력이구요, 봄은 비과세입니다. - 꽃기름주유소 / 고경숙 4대강 삽질 현장을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 차일피일 뒤로 미루기만 한다. 많이 아프고 화가 날 것 같지만 ..

시읽는기쁨 2010.06.11

아네스의 노래 / 미자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

시읽는기쁨 2010.05.31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

시읽는기쁨 2010.05.27

육십이 되면 / 김승희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정든 땅 정든 집을 그대로 두고 장농과 식기와 냄비들을 그대로 두고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갠지스 강가로 딸아, 안녕히, 그동안 난 너를 예배처럼 섬겼으니, 남편이여, 그대도 안녕, 그동안 그렸던 희비의 쌍곡선을 모두 잊어주게 축하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 그대의 축하를 받으며 난 이승의 가장 먼 뱃길에 오르리 생명의 일을 모두 마친 사람들이 갠지스 강가에 누워 태양의 괴멸작용을 기다린다는 곳, 환시인 듯 허공 중에 만다라花가 꽃피며, 성스러운 재와 오줌이 혼합된 더러운 갠지스 물을 마시며 이승의 정죄와 저승의 빛을 구한다는 더러운 순결의 나라로 해골의 분말이 물 위에 둥둥 뜨면 해와 달과 별이 그려진 거대한 수레바퀴가 반짝반짝 혼령을 실어나르고 미쳐도 오직 신령으로 미친..

시읽는기쁨 2010.05.17

벼슬을 저마다 하면 / 김창업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 벼슬을 저마다 하면 / 김창업 한가한 일요일 오전, 집에서 빈둥거리며 TV를 보는데 'TV 쇼 진풍명품'에서 마침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 - 1721))의 영정이 나왔다. 11대 후손이 갖고 나온 그 영정값이 무려 2억 원이 넘었다. 노가재는 숙종 때의 문인으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이 깊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글과 그림에 능했는데 이 영정은 본인이 스스로 그린 자화상으로 전해지는 그림이었다. 노가재의 그런 삶이 이 시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벼슬이나 명예, 또는 건강을 바라는 것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

시읽는기쁨 2010.05.09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않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수선화에게 / 정호승 그런 시절이 있었다. 너무 외롭고 답답했다.내 속마음을 들어줄 사람 하나도 없었다. 술만 마시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이 시의 따스한 손길에 또 울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싯구 하나하나가 가슴에 파고들었..

시읽는기쁨 2010.05.08

사랑법 첫째 /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맹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 사랑법 첫째 / 고정희 오늘이 어린이날이다. 마침 어제는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10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 국제 비교'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도는 54% 정도로 OECD 20개 나라 중 꼴찌를 기록했다. 가장 큰 이유가 학업 스트레스와 부모와의 갈등 때..

시읽는기쁨 2010.05.05

봄의 소식 /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와서 몸 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 봄의 소식(消息) / 신동엽 봄이 봄 같지 않다. 일조량 부족에 냉해, 거기..

시읽는기쁨 2010.04.28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내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

시읽는기쁨 2010.04.22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버지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

시읽는기쁨 2010.04.18

야누스의 나무들 / 이경임

몸의 반쪽은 봄을 살고 몸의 반쪽은 겨울을 산다 꿈의 반쪽은 하늘에 걸어두고 꿈의 반쪽은 땅속에 묻어둔다 마음의 반쪽은 광장이고 마음의 반쪽은 밀실이다 생각의 반쪽은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반쪽은 잎새들을 지운다 집의 반쪽은 감옥이고 집의 반쪽은 둥지이다 - 야누스의 나무들 / 이경임 인생은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겉의 얼굴만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이 그러하다. 겨울이 있기 때문에 봄이 찾아오고, 피어나는 꽃들은 잎새들을 지우는 약속을 한다. 행복은 불행을 잉태하고, 슬픔은 기쁨의 자식을 키운다. 복(福) 속에는 화(禍)가 숨어 있고, 화는 복을 부른다. 밝고 아름답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어둠이 있어야 별은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인생이란 정말 그런 것이다. 이만큼 나이가 드니까 이젠 그걸 몸..

시읽는기쁨 2010.04.13

무언으로 오는 봄 /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 무언(無言)으로 오는 봄 / 박재삼 시끄럽고 어수선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은 왔다. 말없이 묵묵히 가까이 왔다. 집 뒤 응달의 개나리도 봄물이 들기 시작했다. 가지에 찍힌 노란 점들이 애틋하고 눈물겹다. 널 보면 왜 자꾸 한숨이 나오는지..... 심신이 지쳐가던 이때에 다행히 며칠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내일부터는 봄을 만나러 가까운 산에라도 들어가봐야겠다. 온갖 소음으로 들끓는 내 마음도 조금은..

시읽는기쁨 2010.04.06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삶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시읽는기쁨 2010.04.02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애인이 빨리 늙어 소처럼 느리고 순해지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느지막이 일어나 찬 없는 밥을 우물우물 먹고 나서 산수유 꽃 피었드만, 그거나 보러 가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구경도 참 쏠쏠하구먼, 천천히 걷지 뭐, 그랬으면 좋겠네 강 언덕에 시름도 없이 앉아서는 노을빛이 퍽 곱구먼, 그랬으면 좋겠네 주름진 내 손을 슬쩍 당기며 거 참, 달빛 한번 은근하네, 그랬으면 좋겠네 애인이 빨리 늙어 꾀병 같은 몸사랑은 그만두고 마음사랑이나 한껏 했으면 좋겠네 산수유 그늘 아래 누워 서로의 흰 머리칼이나 뽑아주면 좋겠네 성근 머리칼에 풀꽃송이 두엇 꽂아놓고 킥킥거렸으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허허 웃으며 주름진 이마나 긁적거리면 좋겠네 아직두 철부지 소녀 같다고 거짓농이나 던져주면 좋겠네 한세상 흐릿흐릿 늙어..

시읽는기쁨 2010.03.30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은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어느 자리에선가 미당 얘기가 나왔을 때, 국어 선생님이신 S 형이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S 형은 미..

시읽는기쁨 2010.03.25

호라지좆 / 김중식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저 날뛰는 세월에 대책 없이 꽃피우다 들켜버린 놈이고 대놓고 물건 흔드는 정신의 나체주의자이다 오오 좆같은 새끼들 앞에서 이 좆새끼는 얼마나 당당하냐 한 시대가 무너져도 끝끝내 살아남는 놈들 앞에서 내 가시로 내 대가리 찍어서 반쯤 죽을 만큼만 얼굴 붉히는 이 짓은 또한 얼마나 당당하며 변절의 첩첩 산성 속에서 나의 노출증은 얼마나 순결한 할례냐 정당방위냐 우우 좆같은 새끼들아 면죄를 구걸하는 고백도 못 하는 씨발놈들아 - 호라지좆 / 김중식 호라지좆은 천문동(天門冬)이라는 약초의 다른 이름이다. 어감으로 볼 때 처음에는 '홀아비좆'이었던 게 변형된 것 같다. 아마 천문동의 어느 부분이 거시기와 닮아서 이런 정겨운(?) 이름이 붙지 않았나 싶다. 천문동의 뿌리는 강정제로 유명하다는데..

시읽는기쁨 2010.03.18

꽃말 하나를 / 이시하

봄이 오면 작은 화단에 이름 모를 꽃들이나 심어야지. 그리고선 내 맘대로 순이, 덕이, 점례, 끝순이 같은 이름이나 지어 줘야지. 지친 저녁달이 마른 감나무에 걸터앉아 졸 즈음엔 이름이나 한 번씩 불러 봐야지. 촌스러워, 촌스러워, 고개를 흔들어도 흠, 흠, 모른 척 해야지. 그래놓고 나 혼자만 간절한 꽃말 하나 품어야지 당신 모르게, 당신은 정말 모르게 - 꽃말 하나를 / 이시하 봄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맞는 것이다. 각자 자신만의 꽃말 하나씩을 가지고.... 세상이 험하다고 상춘곡을 부르지 못하랴. 화단에는 노랑나비가 춤을 추게 할 테야.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취해서 흔들릴거야. 당신 모르게, 당신은 정말 모르게.

시읽는기쁨 2010.03.13

지독한 어둠 / 심재휘

아홉 살 딸아이는 어둠이 무섭다고 잠자리에 누워 말한다 나는 스텐드의 불빛을 가을 이불처럼 흐리게 덮어주고 나온다 그러면 딸아이는 오늘 밤 흉한 꿈을 꾸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불 꺼진 거실에 서서 나의 어둠이 밝아지도록 한참을 기다린다 어둠 저편의 방으로 건너가기 위해 나의 눈은 그저기다릴 수밖에 없다 스텐드도 없이 변명도 없이 몸 하나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캄캄함 속에 서보면 안다 그러나 기어이 어둠보다 먼저 밝아오는 슬픔 언젠가는 너도 이 지독한 어둠 속에 결국 혼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나는 온몸에 가난한 어둠을 묻히고 다시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내 이불을 차버리고 잠든 모습이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서글픈 것이냐 - 지독한 어둠 / 심재휘 인간은 결국 지독한 어둠 속에 혼자..

시읽는기쁨 201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