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샌. 2010. 8. 2. 10:08

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과 환락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을 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에도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을 분석해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한데도 역시 왕은 부럽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섹시하다.

노예들을 불쌍히 생각해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 때문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라고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마광수

 

얼마 전 신문에서 마광수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보며 한 인간을 인간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언론 보도로 드러나는 인간의 단면만 보고 인간 전체를 단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존의 관념에 저항하고 그 벽을 깨뜨리는 작업이 어떤 가시밭길인지를 마 교수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반공 이데올로기든, 성의 허위의식이든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들이 교수직을 박탈 당하고 감옥에도 들어갔다. 주류로부터는 철저히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그런 왕따들의 선구자적 희생에 의해서 사회 의식은 조금씩 진보해 나간다고 믿는다. 나는 그런 아나키스트적인 솔직함, 용기를 존경한다.

 

또한 이렇게 솔직하게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한다. 표현만 못할 뿐이지 내 속의 검은 욕망, 가학적 폭력성, 이기적 음란성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그것들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아닌가고 여겨지기도 한다.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고 한없는 도덕군자인 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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