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미루나무 붓글씨 / 공광규

샌. 2010. 8. 14. 08:47

시냇가 미루나무 여럿

들판 캔버스에 그림을 그립니다

바람 부는 날은 더 열심히 그려댑니다

곧은길만 가기 어려운 사람 발걸음을 생각해

논둑과 밭둑과 길은 휘어지게 그리고

높이 떴다 지는 둥근 해가 다치지 않게

산 능선을 곡선으로 그립니다

미루나무도 개구쟁이 아이를 키우는지

물감통을 들판에 확! 엎지를 때가 있습니다

미루나무도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이 되면

붓을 빨러 냇물로 내려가다 뒹구는지

노란 물감을 하늘에 뿌리거나

언덕에 물감을 흘려놓기도 합니다

미루나무의 실수는 천진해서 별이나 풀꽃이 됩니다

이런 미루나무도 심심한 날이 있어서

뭐라 뭐라 허공에 붓글씨를 쓰기도 하는데

나는 어려서 꼭 한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광규야, 가출하거라."

 

- 미루나무 붓글씨 / 공광규

 

미루나무나 포플러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흔하게 보던 나무였다. 당시 마을 앞을 지나는 신작로에는 가로수로 포플러가 심어져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바람에 찰랑거리며 몸을 뒤집던 포플러 잎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또 마을 앞 저수지 둑에는 키 큰 미루나무 대여섯 그루가 있어 마을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다.

 

그러나 포플러 가로수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마지막 남아 있던 마을 앞 미루나무도 몇 년 전에 제 수명을 다했다. 이제 고향에는 단 한 그루의 미루나무나 포플러도 볼 수 없다. 그 나무들이 사라진 고향은 전보다 더 쓸쓸해졌다. 왠일인지 사람들은 더 이상 미루나무를 심지 않는다. 재질이 물러 별 쓰임새가 없다 하지만 미루나무만큼 미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슴에 다가오는 나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름 전원에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어야 화룡점정의 풍경이지 않은가.

 

도연명은 집 주위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쓰기도 했다. 나도 버드나무 대신 미루나무를 심어 도연명 흉내를 내보고 싶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