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부도덕하게 살거다 / 손현숙

샌. 2010. 7. 15. 10:18

머리 실핏줄이 막혀서, 하도 기가 막혀서 덜컥 누워버린 늙은 엄마, 늙은 아버지가 병문안 오면 슬쩍 눈 흘기면서 대놓고 “가소, 마”한다 그리고 곧이어 “부도덕한 늙은이!” 혼잣말인 척 짐짓, 다 들리도록 중얼거린다 천 번도 더 들은 저 말, 삼강오륜으로 중무장한 우리엄마는 지금 입만 살아서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있지만, 평생 부도덕했던 우리 아버지 팔순을 넘기고도 정정하게 훠이 훠이 세상 끝까지 마실 다닌다


나, 이제부터 무조건 부도덕하게 살거다 도덕 찾다가 늙어, 어느 날 뒷목 잡고 넘어가느니, 요놈의 사탕 같은 세상 실컷 빨면서 들통 나지 않게 시치미 딱 잡아떼고 치맛자락 살살 흔들면서, 살거다


부도덕한 늙은이! 그 누가 뭐라 뭐라 씹어도 끄떡없는 아버지, 지금 엄마 등 쓸어준다 발 닦아준다 에그그, 지금 저토록 행복한 엄마, 그러니까 나,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오래 살거다 그렇게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인간답게 아버지처럼..., 인간답게 엄마처럼...,


- 부도덕하게 살거다 / 손현숙


아픈 엄마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애잔하면서도 따스하다. 부도덕했던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엄마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이 읽힌다. 엄마가 쓰러진 게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자신도 아버지처럼 부도덕하게 살겠다고 외칠까 싶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원망하지는 않는다. 딸들은 과거에 아무리 모질게 했더라도 나이가 들어 노쇠해진 아버지를 대부분 용서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도 연민의 일종일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정말 무엇일까?


우연히 시인이 같은 상황에 대해 쓴 산문을 보게 되었다. ‘엄마, 미안해!’라는 제목인데 아래에 옮겼다.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엄마, 미안해! / 손현숙


엄마가 쓰러졌다. 밥 잘 먹고 TV ‘해피투게더’ 보다말고 어, 어, 어, 천정과 바닥이 빙글 돌면서 몸이 나무토막처럼 넘어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저 뭔가 조금 잘못된 것이려니, 생각했다. 도대체 엄마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상한 분노 같은 것도 일었다. 어떻게 엄마가 나를 두고 아플 수 있을까.


기도와 식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고장이 생기면서 엄마에게도 많은 문제가 생겼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이렇게 코로 음식을 섭취하면서, 말은 지물지물 새고, 걷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고, 또한 사고 자체는 아주 어린아이에 머물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기적을 바라보아야 하는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 우리 자식들은 서울 대구를 오르내리면서 차차로 말들이 줄었다. 팔순을 훨씬 넘긴 아버지는 매일 도장 찍 듯 병실을 들락거렸다. 의식이 흐린 가운데서도 엄마는 아버지를 마땅찮게 생각했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버지도 편치는 않아 보였다.


여름에서 가을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0.3mm의 기적이 일어났다. 엉망으로 막혔던 숨골 옆의 미세혈관이 0.3mm차이로 조금씩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억과 말초와 서정적인 기능이 느리지만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는 예전의 내 엄마는 아니었다. 긴 시간 엄마를 돌보던 둘째 오빠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큰오빠는 뭔가 마음으로 각오를 하는 듯 했고, 셋째 오빠는, 글쎄..., 고뇌했으리라. 평생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곱게 접고 살던 엄마가 세상을 향해, 아버지를 향해 사정없이 포악해졌다.


아버지가 눈에 보이기만 하면 ‘부도덕한 늙은이’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평생 삼강오륜으로 중무장하고 살던 엄마는 늙은 아버지가 병문안 오면 ‘가소 마’ 슬쩍 눈을 흘긴다. 한량처럼 훠이훠이 세상을 휘젓고 살던 아버지, 사탕 같은 세상 혼자 실컷 빨면서 살았던 그분을 엄마는 끝내 용서하기가 힘들었나보다. 그러나 아버지는 누가 뭐라뭐라 씹어도 아랑곳없다. 죽지 않고 살아난 아내가 그저 고맙다는 듯, 엄마의 등을 쓸고 발을 닦아준다.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우리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왕조가 한 여자의 무너짐으로 인해 휘청, 흔들리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엄마가 떠받치지 않는 아버지의 존재란 이 땅에서 더 이상 의미조차도 없는 듯 보였다. 이제야 겨우 자기 자신을 챙기기 시작한 엄마를 보고 우리는 모두 입을 모아 ‘엄마가 변했다’ 쑤근거렸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분은 자식들이 모두 일가를 이룰 때까지 마음껏 한 번 아파보지도 못했던 분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도 변해버린 엄마가 낯설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가사상태에 빠진 것이라 믿는다. 포유동물이 겨울동안 깊은 잠을 자듯이, 엄마는 생에 처음 화려한 휴가를 맡은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단계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리라. 비밀스런 평온, 자연과의 협동 같은 것. 여전히 꿈속에서는 혼란스런 삶을 상기해야겠지만, 반드시 봄은 돌아올 것이고 엄마는 반드시 잠에서 깨어나리라. 그러니 지금은 누구도 그분을 깨우면 안 되는 거다. 평생 구두장이가 구두를 깁듯이 또박또박 한 길 만을 고집 하며 살았던, 한 여자의 인생에 쉿! 누구도 휴식을 방해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