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가 대통령이면 / 김해자

샌. 2010. 7. 8. 14:49

큰일은 절대 하지 않으리

정권 바뀔 때마다 뒤집어엎는 백년지대계 같은 일에 손대서

안 그래도 어질어질한 우리 아이들 갈팡질팡 비틀대지 않게 하리

다만 아주 작은 것,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작고 작아 티도 안 나는 일 몇 가지는 해야지

교실마다 황토빛 은은히 도는 커튼을 치고 향나무 침대 몇 개 두어

쉬는 시간에 아이들 쉬어가게 해야지

졸려서 눈꺼풀이 내려앉는 아이들 몇 분이라도 허리 쫙 펴게

글자로 하는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들은 들로 밭으로 쏘다니게 해야지

가만히 누워 하늘 올려다보게

가만히 앉아 이슬 한 방울 바람이 흔드는 쑥잎 하나 가만히 들여다보게

들여다보다 들여다보다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쑥부쟁이 되고 개미가 되고 흙이 되고 하늘이 되고 야생 고양이 되고 바람이 되고

바람과 하늘의 영혼으로 흔들리게 하리라


문득 인간으로 돌아와 몸이 근질거릴 즈음에

여태 들여다본 것 외우게 하리

지천으로 돋아나서 음식이 되고 보약이 되는

개망초 명아주 마타리 하늘타리 소리쟁이 박주가리 닭의장풀

저마다 좋아하는 백가지 나무 풀 꽃 잎 보고 약효까지 익히면

과학점수는 후하게 주게 하리

제가 만난 꽃 풀 구름 바람 몇 개 엮어 시랍시고 끄적거릴라치면

국어점수도 아주 조금 올려주리

멀쩡한 집 허는 대신 짚을 이겨 흙 바르고 뚫린 데 막아

가만가만 숨 쉬는 집으로 돌릴작시면 기술점수도 후하게 주게 하리

여기저기 재고 자르고 이어 붙이느라 기하와 도형도 좀 했으니

미적분 아리까리해도 수학점수도 덤으로 올려주리라


까르르 웃으며 아이들이 꾸민 그 집에

사시사철 쿨럭거리는 노인들 옮겨 살게 하리

병자와 노인들은 결단코 지하셋방에 살게 하지 않으리

그도저도 지나서 아이들이 아예 농사꾼이 되고 싶다면

아침에는 일하고 한낮에는 북 치고 기타치고 놀다

한 삼년만 재미나게 보내면 새들과 풀들을 즐겁게 해준 공로로

대학 들어갈 자격증도 주리

삼년 흘린 땀방울도 품값 쳐서 장학금도 주리

시험 못쳤다고 혼나는 일 없게 하리

임대아파트 산다고 은따 당하는 일 없게 하리

엄마가 남부시장에서 장사한다고 주눅드는 일 없게 하리

이등 했다고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리라


내가 대통령이면 큰일은 절대 하지 않으리

큰 건물을 짓는다거나 갯벌을 메운다거나 강을 산으로 옮긴다거나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조차 쌓는 일 단연코 없으리

지구가 한번만 몸부림치면 속절없이 무너져 깔릴

바벨탑 같은 건 쌓지도 않으리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든 추억 같은 건 함부로 허물지 않고

억조창생 이어온 목숨들 억울하게 쫓아내지 않으리라

있는 건 있는 대로 없는 건 없는 대로

물길은 물길대로 흙길은 흙길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천하태평 게으르고 헐렁한 대통령이 되리


부수고 헐고 쌓느라 강가에 모래알만큼 많은 돈

일자리 찾아 헤매느라 아픈 자들에게 나눠 주리

경쟁에서 탈락한 패배자들에게 돌려주리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천그루 나무를 심으면

뼈빠지게 농사짓다 빚지고 떠나간 폐가 되살려 살게 하리

이 들 저 들 쏘다니며 백만송이 꽃씨 뿌리면

그 꽃씨 자라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을 피우면

비산비야 방초 우거진 땅도 거저 빌려 주리

이 산 저 산 아침 이슬 머금고 고사리와 참취 솜나물 말려 도시에 보내게 하리

삼분의 일은 저가 먹고 나머지는 도시에 보내 나눠 먹게 하리

북쪽 식구들과 사람 대 사람 가족 대 가족으로 자매결연을 맺으리

귀한 것 서로 남는 것 싸서 한지 고운 종이에 편지로 덮어 보내게 하리

유전자도 피도 같은 99.999% 똑같은 내 형제들

낟알 없어 굶어죽지는 않게 하리라


내가 대통령이면 진보니 개혁이니 혁명 같은 말을 하지 않으리라

배는 부르고 심장은 부지런하여 새소리 따라 흥얼거리게 하리

팔다리는 튼튼하고 머리는 텅 비어 그저 풀잎 따라 춤추게 하리

조금 더 건설하셔야죠, 조금 더 빵을 늘려야죠

조금 더 조금 더 저만치만 더, 아무리 귀찮게 해도

지지불태, 멈출 때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리라

유일하게 아는 사자성어 들이대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제발 머리 좀 쓰시죠 각하, 애정어린 충고에도

허허허, 잔머리 같은 건 도통 쓰지 않으리라

머리 좋다는 인류가 지구를 이 지경 만들었으니

인류 중에서도 머리 좋은 것들이 높이 올라가려다 세상 병들게 했으니

머리 좋다는 인류가 지구를 이 지경 만들었으니

인류 중에서도 머리 좋다는 것들이 세상 아프게 만들었으니

지금이라도 거꾸로 가보자고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자고

있는 건 있는 대로 없는 건 없는 대로

물길은 물길대로 흙길은 흙길대로 그냥 내버려두리

저 홀로 흐르게 하리

45억년 스스로 제 길 만들며 흘러온 대로

그냥 흘러가게 하리 저마다

제 생긴 대로 꽃피우게 하리


- 내가 대통령이면 / 김해자


이번 호 <녹색평론>에 실린 시다. 이 시를 읽으며 존 레넌의 ‘이메진’이 떠올랐다. 또 노자와 장자의 얼굴도 떠올랐다. 시인이 그리는 것은 노자와 장자의 꿈이 구현된 나라가 아닐까 싶다. 대통령이 누구고 무슨 당이 있는지도 모른 채 평화롭게 밥 먹고 평화롭게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진다. 하느님 나라는 작은 겨자씨 같다고 했다. 몽상도 모으고 모아서 고이 키우면 현실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천리(天理)에 이어지는 꿈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