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육십이 되면 / 김승희

샌. 2010. 5. 17. 11:18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정든 땅 정든 집을 그대로 두고

장농과 식기와 냄비들을 그대로 두고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갠지스 강가로

 

딸아, 안녕히,

그동안 난 너를 예배처럼 섬겼으니,

남편이여, 그대도 안녕,

그동안 그렸던 희비의 쌍곡선을

모두 잊어주게

축하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

그대의 축하를 받으며

난 이승의 가장 먼 뱃길에 오르리

 

생명의 일을 모두 마친 사람들이

갠지스 강가에 누워

태양의 괴멸작용을 기다린다는 곳,

환시인 듯

허공 중에 만다라花가 꽃피며,

성스러운 재와 오줌이 혼합된

더러운 갠지스 물을 마시며

이승의 정죄와 저승의 빛을

구한다는

더러운 순결의 나라로

 

해골의 분말이 물 위에 둥둥 뜨면

해와 달과 별이

그려진 거대한

수레바퀴가 반짝반짝 혼령을 실어나르고

미쳐도 오직 신령으로 미친 사람들이

죽음의 천궁도를 들여다보며

환생을 근심하는 찬란한

강가

 

난 그 강가로 가리

힌두의 장법대로

붉은 천 하나 몸에 두르고

어느 날 햇빛 아래 문득 쓰러지면

힌두의 승려들이 나를 태워주겠지

저승돈 삼십 냥을 빈손에 들고

나는 끝으로 말하리라

부디 사리를 채취하지 말아주게,

마치 모닥불 위에 장미꽃잎을 얹은

것처럼

그리고 그 불은 아름답겠지

 

해골의 분말이

그 강위에 뿌려지면

난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오리,

한강이 되어 섬진강이 되어

광주 어귀의 극락강이 되어

어머니의 나라 딸의 나라

내 원죄의 나라로

 

육십이 되면

그러나 나는 떠나리라

성훼와 식수가 뒤섞인

그 이상한 나라,

뼈 한 점 한 점마다

환각의 약초가 피어나고

슬픔이 완전 소독되고

임종의 오줌 안에서

뱀이 불같은 머리를 트는 그곳으로,

죽음마저 차마 예술이 되는

끝없는 끝의

그 먼 나라로

 

- 육십이 되면 / 김승희

 

옛날에는 나이 오십이 되면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였다. 오십자술(五十自述)을 써서 한 매듭 짓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다. 힌두교에서도 나이 오십이 되면 임서기(林棲期)라고 해서 가족을 떠나 숲에서 은둔하며 수행을 했다. 그런데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육십이 넘어야 옛날 사람들 오십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아마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해방될 수 있는 시기가육십을 넘어 육십과 육십오세 사이 쯤일지도 모른다.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는 시인의 선언을 들으니 내 가슴도 뛴다. 시인처럼, 딸아, 안녕히, 남편이여, 그대도 안녕, 하고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비록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일지라도 그런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육십이 되면 집안에 틀어박혀 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복된 삶이 될 것 같다. 아니면 누구들처럼 끝없이 세상의 일을 찾아서 동분서주하고 싶지도 않다. 인도나 갠지스 강가가 아니면 어떠리. 육십이 되면 나도 떠나리. 온갖 욕망이 하얗게 표백된 그 먼 순결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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