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네스의 노래 / 미자

샌. 2010. 5. 31. 11:27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아네스의 노래 / 미자


영화 ‘시’에서 미자[윤정희]가 쓴 시다. 힘든 삶 속에서 시를 통해 위안을 받던 미자는 시 쓰기를 배우는 마지막 날에 이 시와 꽃다발을 교탁 위에 두고 사라진다. 제목에 나오는 ‘아네스’는 또래 남학생들에게 성폭행 당한 후 자살한 소녀의 가톨릭 세례명이다. 미자와 함께 사는 손자도 범행에 가담되어 있다. 그러나 한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이들은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라고는 없고, 어른들도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고만 한다. 추악한 현실을 살지만 미자는 세상을 원망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 겉으로는 그저 담담하게 무심한 듯 바라볼 뿐이다. 시는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도구다. 타인의 고통에 아파하고 슬퍼하는 그녀의 마음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아네스의 입을 빌려 그녀는 세상에 대해 축복과 기도의 말을 전한다. 그것은 폭력 자체가 아니라 폭력을 행하는 인간에 대한 용서와 연민의 마음일 것이다. 쓰레기통 같은 세상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시로 표현하려는 미자는 진짜 시인임에 틀림없다. 영화에서 유명 시인의 시가 여러 편 소개되지만 미자가 쓴 이 시가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이유다. 조금은 철없게도 보이는, 세상과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녀, 미자는 이 시를 남기고 어디로 갔을까? 흐르는 강물이 그녀를 그 먼 나라로 실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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