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2

산꽃 이야기 / 김재진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가령 산딸기가 하는 말이나 노각나무가 꽃 피우며 속삭이는 하얀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톱 한 자루 손에 들고 숲길 가는 동안 떨고 있는 나무들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꿈틀거리며 흙 속을 사는 지렁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제는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늑대의 눈 속으로 벅차오른 산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와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의 그 많은 창문들 하나하나 열어 볼 수 있다면 휘영청 달뜨는 밤 산꽃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 산꽃 이야기 / 김재진 라는책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대학교에 다닐 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식물도 인간과 같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생각도 한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지금도 책 제목이 생각나는 걸 보면 당..

시읽는기쁨 2011.02.19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 이형기 '이제 3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합니다. 스스로 원한 것이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쉽고 허전한 마음 역시 숨길 수 없습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싸웠던 시간들, 보람도 있었지만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도 많았습니다. 뒤돌아보니 좋았던 일보다는 후회되고 자책되는 일들이 더 많이 떠오..

시읽는기쁨 2011.02.11

염장이와 선사 / 조오현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고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 뚜껑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은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은 염을 하신 지 몇 해나 되..

시읽는기쁨 2011.02.06

나의 임종은 / 김관식

남향 미닫이, 재양한 마루끝에 귀여운 젖먹이 무릎에 안고 앉아 조용히 엄마의 얼굴처럼 화색이 되는 자애로운 하늘 아래 하찮은 미물들과 푸나무 떨기조차 은총에 젖어 축복을 받는 오늘은 춘분! 낮과 밤이 같은 날. 나의 임종은 자정에 오라!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너를 위해 즐겨 마중하고 있으마 비인 방에 호올로 누워 천고의 비밀을 그윽히 맛보노니... 가여운 아내 아들딸들아. 아이예, 불쌍한 울음일랑 들레지 말라. 그동안 신세끼친 여숙을 떠나 미원한 본택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벌판에 내던지면 소리개와 사갈의 밥이 될 게고 땅에 묻으면 아미와 구더기의 즐거운 향연. (발가숭이로 왔으니 발가숭이로!) 불타여. 피 빨아먹고 산 공변된 공변된 업이요 보가 아니오니까. 백운대 위에 세워 풍장을 해도숱연키야 하..

시읽는기쁨 2011.01.29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 백창우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 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 소주 한 잔 했다고 하..

시읽는기쁨 2011.01.24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 박노해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별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그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꽃도 별도 사람도 세력도 하루아침에 떠오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나빠지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좋아질 뿐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세상도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조금씩 변함없이 변해간다 -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 박노해 내 작은 걸음으로 언제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떠나온 곳은 아득하게 멀다. 작은 걸음이 모이고 모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인생에 왕도는 없다. 모든 것은 조금씩 변함없이 변해간다. 나는 나의 속도로 변하고 있고, 세상은 세상의 속도로 달라..

시읽는기쁨 2011.01.12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새해 새 날이 밝았습니다, 아버지 해마다 주시는 새 날이 온 땅에 밝았습니다 올해에는 하늘을 기르게 해주십시오 우리 몸 속에 심어주신 하늘 싹 고이 길러 마침내 하늘만큼 자라나 사람이 곧 하늘임을 스스로 알게 해 주시고 칼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칼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시고 돈의 힘을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돈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시고 부끄러운 성공보다 오히려 떳떳한 실패를 거두게 하시고 유명한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착한 일 하다가 지친 이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을 가슴 깊이 파주시고 마음이 깨끗해서 슬픈 이들에게는 다함없이 흐르는 맑은 노래 들려주시고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기 전에 작은 촛불, 촛불 하나 밝히게 하시고 솟아오른 봉우리를 부러워하기 전에 솟..

시읽는기쁨 2011.01.01

밥값 /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밥값 / 정호승 서점에 간 길에 정호승 시인의 신작시집 을 샀다. 지난 천안함 사건 때 시인에 실망하여 시를 읽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꼭 그럴 일만 아니다 싶었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으면 편식이 된다. 내 생각이 존중받으려면 나와 다른 생각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는 시 자체로 즐기면 되는 것이지 시인의 사상이나 행위와 꼭 결부시킬 필요는 ..

시읽는기쁨 2010.12.22

두고 온 것들 / 황지우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어느날 내가 살었는지 안 살었는지도 모를 삶이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 ..

시읽는기쁨 2010.12.19

별 /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 별 / 정진규 지금 슬퍼하는 당신, 별을 볼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합니다. 지금 아파하는 당신, 별을 낳을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합니다. 어둠은 다가오는 새벽 때문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로 환하답니다. 지금 웃고 즐거워하는 당신, 당신의 가슴에서는여전히 별들이 빛나고 있나요? 스스로 너무 밝으면 별들은 사라진답니다. 지금 대낮인 사람은 어둡습니다.

시읽는기쁨 2010.12.13

쓸쓸해서 머나먼 / 최승자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쓸쓸해서 머나먼 / 최승자 최승자 시인의 근황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놀랍게도 시인은 심신쇠약과 정신분열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시인은 가족도 없이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여관방과 고시원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밥 대신 소주로 연명하며 죽음 직전 단계까지 간 시인을 외삼촌이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시켰다. 신문에 실린 퀭한 눈의 시인의 얼굴이 애처로웠다. 세상의..

시읽는기쁨 2010.12.08

언젠가는 / 조은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 언젠가는 / 조은 ‘HODIE MIHI, CRAS TIBI’. 서양의 묘지에서..

시읽는기쁨 2010.12.07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드디어 오늘 명퇴원에 도장을 찍었다. 평생을 다닌 직장 그만 두는 게 무척 간단했다. 두 장의 종이에 인적사항 적고 도장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홀가분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다. 그리고 뒤통수 맞을 일도 없을 것 같다. 멋지게 사직서를 던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내 결단을..

시읽는기쁨 2010.12.02

청도 가는 길 / 김윤현

삶이란 결국 피할 수 없는 싸움인가 막걸리에다 수북이 씹히는 콩 꿈도 꾸지 못했던 한약재 이건 내 즐거운 식단이 아니다 나는 이제 풀을 기대할 수 없나 분수에 맞지 않게 배불리 먹고 소화시킨 건 근육 같은 전의(戰意) 세상이 받아 주면 싸움도 죄가 되지 않는 곳으로 뿔을 단단히 세우고 뚜벅뚜벅 걷는다 상대를 무너뜨려야 내가 온전해지는 세상 지고 나면 길고 긴 밤이 온다 무너뜨리는 상대도 알고 보면 내일 또는 먼 훗날의 내가 아닌가 청도로 가는 길목마다 수북이 돋아난 적개심 무엇을 위하여 싸워야 하나 - 청도 가는 길 / 김윤현 새벽 천둥소리가 포탄 떨어지는 소리로 들려 무척 불안했다. 혹 전면전이라도 벌어진 게 아닌가, TV를 켜려고 거실로 나가는데 아내가 밖에 비가 오고 있다며 안심시켰다.자라 보고 놀..

시읽는기쁨 2010.11.30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만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지난봄 단임골에 갔을 때였다. 꽃순이와 나무꾼은 노래를 부르고는 꼭 “배꼽인사” 라고 말하면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 인상적이었다. 두 손을 공손하게 배..

시읽는기쁨 2010.11.26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 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시읽는기쁨 2010.11.20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 정현종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 정현종 아무개가 선사(禪師)를 찾아가 불법을 물었다. 선사가 말했다. “방하착(放下着)!”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아무 것도 가져온 게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짊어지고 가거라!” 깨달음은 한 순간에 찾아왔다. 인간사 모든 문제는 내 마음에서 일어난다. 다들 자신이 만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낑낑거리며 힘들어한다. 돈, 명예, 성공, 체면, 과거의 아픈 기억 등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스스로 차꼬를 차고 고생하고 있는 꼴이다.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나’라는 물건도 쉽게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가벼워질 것인..

시읽는기쁨 2010.11.11

가족 / 진은영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 가족 / 진은영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혼자라면 가족으로부터 아무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결혼한 사람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도 가족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은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다. 죽을 때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가정이 따스한 보금자리만은 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말 못하고 견뎌야 하는 아픔이 있다.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상처는 더 쓰리고 아프다. 유아기 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평생을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부모자식 사이에 또는 형제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가..

시읽는기쁨 2010.11.03

행복론 /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행복론 / 최영미 행복이란 무엇인가? 몇 개 공감이 가는 구절도 있지만 전체적으..

시읽는기쁨 2010.10.28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 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 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 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매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파 못다 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가을이어선지 이 시가 더 애절하다. 온 몸으로 시대에 저항했던 시인은 서른아홉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젊었을 때 생긴 간디스토마에서 끝내 회..

시읽는기쁨 2010.10.21

가을의 전설 / 안도현

완주군 경천면 대아리 저수지 물가에 빈 배 한 척 한가로이 매여 있기에 그 배 빌려 타고 단풍놀이나 즐겨볼까 싶어서 주인네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더니 주인은 낮술에 취해 허리띠 풀어놓고 마루 위에 붉은 고추 멍석으로 누워 잠들었고 주인 아낙께서 고추를 매만지다 하시는 말씀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고 헌다요?" 그 말씀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내 아내는 뒷걸음치다가 저만치서 막 불이 붙어서 그만 단풍나무 한 그루로 타올랐습니다 - 가을의 전설 / 안도현 '가을의 전설'이라고 하면 야구 팬은 한국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지금 삼성과 두산의 포스트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나도 재미있게 보고 있다. 4차전까지 늘 1점차로 승부가 갈려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영화 애호가라면 같은 제목의 영화를 연상할지 모..

시읽는기쁨 2010.10.13

기다리는 시간 / 서정홍

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사람을 기다리다 보면 설레는 마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 생각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람을 기다려 주는 일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다음에 또 기다려 주는 일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 기다리는 시간 / 서정홍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기다리기를 잘 못한다. 며칠 전이었다. 후배 Y와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왔다. 나는 불 같이 화를 내었다. 나는 시간 약속 못 지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도대체 벌써 몇 번째야, 후배는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내에게 주로 화를 낼 ..

시읽는기쁨 2010.10.04

부석사에서 / 도종환

오백년 천년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가슴께에 칠해진 어지러운 원색의 빛깔들 여름이면 바다처럼 펼쳐진 산줄기에 나누어주고 가을이면 새빨간 빛깔들 뒷산 숲에 던져주고 나머지 짙게 덧칠해진 단청빛마저 마음에 걸려 바람에 던져주고 하늘에 풀어주고 세월 속에 가장 때묻지 않은 얼굴빛으로 엷어져 본래 제가 지녔던 나무 빛깔로 돌아오며 겸허해지고 담백하게 욕심을 벗어 더욱 굳세어지고 그렇게 버리면서 육백년을 지나왔으려니 백년도 백년의 절반도 다 못 살면서 더 화려하고 더 강렬할 빛깔을 지니고자 더 큰 목소리와 더욱 단단한 기둥을 거느리고자 기를 쓰다가 허세부리다가 우리들은 사바세상 티끌과 먼지로 사라지느니 진정 오래오래 사는 길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요란한 파격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던 맞배지붕은 보여주..

시읽는기쁨 2010.09.29

가끔은 세상이 환하다 / 차옥혜

친구 영숙이는 나이 50이 넘어 간호사 자격증을 따고 좋은 수입을 올리던 외과의사 남편과 함께 사택으로 10여 평 아파트와 두 사람 합쳐 월급 100$을 받기로 하고 카자흐스탄 알마타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의료봉사 길을 떠났다 알마타이 대평원엔 긴 겨울 내내 눈이 덮이고 시내엔 오전 내내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나무마다 얼음꽃이 피고 집 없는 사람들이 동상 걸린 발을 질질 끌며 서성거린다고 치료받으러 온 동상 환자의 양말이 발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살과 함께 도려낸다고 환자들 몸에서 이가 뚝뚝 떨어지고 어떤 환자의 몸은 일부가 썩어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상처 냄새가 분뇨 냄새보다 심했다고 어떤 환자들은 약을 주면 팔아 빵을 산다고 의료봉사 틈틈이 야채를 길러 팔아 병원 재정에 보태야 ..

시읽는기쁨 2010.09.28

풀나라 / 박태일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젖쟁이 노랑쟁이 나생이 잔다꾸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파도밭을 담장으로 삼고 사는 나라 예순 아들이 여든 어머니 점심상을 차리고 예순 젊은이가 열 살 버릇대로 대소사 상다리 이고 지는 마을 사람만 봐도 개는 굼실 집 안으로 내빼 이름 잊혀진 채 그저 풀로만 불리는 강바랭이 씀바구 광대쟁이 독새기 이장 댁 한산 할배 마을 회관 마룻바닥에 소금 전 양 등줄 꺼지게 누운 마을 토광 옆 마늘 종다리는 무슨 힘으로 아침저녁 울컥벌컥 잘도 돋는데 한때 마흔 이제 스무 집 어른들 집집 다 버리고 마을 회관 두 방 문지방 내외하며 자고 먹는 풀나라 굴 양식 뜰것이 아침마다 허옇게 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바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 풀나라 / 박태일 추석 귀성 행렬이..

시읽는기쁨 2010.09.19

등잔 /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등잔 / 신달자 시인이 쓴 수필집 를 읽고 가슴이 아렸다. 남편의 뇌졸중, 24년 동안의 병수발, 낙상으로 쓰러진 시어머니 간병 9년, 본인의 유방암 투병 등, 운명이 어찌 이렇게 가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인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바보처럼 그 모든 시련을 감내하고 극복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시읽는기쁨 2010.09.14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닷물에 텃밭 떠난 배추 같은 생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얻어 타고 먼 바다 휭, 하니 돌다 왔으면,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를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

시읽는기쁨 2010.09.09

팔죽시(八竹詩) / 부설거사(浮雪居士)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粥粥飯飯生此竹 是是非非看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 八竹詩 / 浮雪居士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보내 7 세기 신라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있었다. 그는 서라벌에서 출생해서 20세 때 출가를 했다. 수도를 위해 명산대천을 순례하던 중 김제에서 묘화(妙花)라는 아가씨를 만나 환속했다. 그리고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다. 부설거사는 뒤에 내변산 쌍선봉 중턱에 월명암(月明庵)을 짓고 수도..

시읽는기쁨 2010.09.04

기찬 딸 / 김진완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

시읽는기쁨 2010.08.30

너는 누구에게 물어보았니 / 송경동

너는 물어보았니 그 강변 땅 위의 별인 조약돌들에게 골재가 되고 싶으냐, 라고 물어보았니 달빛 고운 여울목에서 맑은 돌눈이 되어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고 싶니, 아니면 흙탕물 속에 수장된 병든 자갈눈이 되고 싶니, 라고 강변에서 볕에 마르는 탄탄한 몸이 되고 싶은지 물이끼 촉촉이 서린 서늘한 몸이 되고 싶은지 너는 물어보았니 그 강물 속 물고기들에게 버들치에게 꺾쇠에게 피리에게 물어보았니 흐르는 물살을 따라 어디까지 가고 싶은 여행이었는지 물어보았니 우웅우웅 하루에도 몇 번씩 스크루 갈퀴가 캐터필러처럼 불도저처럼 삽날처럼 강바닥을 헤집는 탁류 속에서 살고 싶은지, 상수원 맑은 물 속 조용한 빛화살촉들로 살고 싶은지 물어보았니 갑문 앞에서 줄지어 섰다 우르르 내쫓겨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난민들의 피난 행렬이..

시읽는기쁨 2010.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