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낙화 / 이형기

샌. 2011. 2. 11. 08:05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 이형기

 

'이제 3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합니다.
스스로 원한 것이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쉽고 허전한 마음 역시 숨길 수 없습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싸웠던 시간들, 보람도 있었지만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도 많았습니다.
뒤돌아보니 좋았던 일보다는 후회되고 자책되는 일들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지금은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떠나려 합니다.
미래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또 한 번 속는 셈 치고 희망과 기대를 겁니다.

인생 제 2막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좀더 낮아지고 작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 일 없는 심심함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위해서는 상응하는 노력과 고통이 필요함도 압니다.

교직생활의 마지막을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따스했던 선생님들의 정을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마땅히 직접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이렇게 통신망으로 대신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살았으니 조용히 물러가렵니다.

나이를 먹었다는 핑계로 학교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선생님들께 폐만 끼쳐드린 것 같아 송구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열심히 살 걸, 좀더 얘기와 친교를 나눌 걸, 못난 인간은 늘 지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널리 해량해 주십시오.

선생님들의 건강과 발전, 그리고 가내의 평안과 행복을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내부통신망에 퇴임을 알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관리자는 퇴임식을 하라고 종용했지만 몇 년 전부터 생각했던대로 내 고집을 관철했다. 다행히 함께 퇴임하는 분도 동조해 주셨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젊었을 때 그저 멋모르고 외우고 다녔던 이 구절이 퇴임의 때에 가슴을 울릴 줄은 몰랐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은 가야 할 때가 맞다. 그리고 이별과 소멸이 아름다운건 뒤에 무성한 녹음과 열매 맺는 가을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낙화(落花)는 개화(開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변하고 소멸하는 것을 인정하고 처절히 절망한 후에야 인간에게 본질적 자유가 주어진다.' 꽃은 떨어지고 피고, 다시 떨어지고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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