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언젠가는 / 조은

샌. 2010. 12. 7. 11:35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 언젠가는 / 조은


‘HODIE MIHI, CRAS TIBI’. 서양의 묘지에서 자주 만나는 글귀로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이라고 한다. 죽음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특히 지인의 부음을 들은 날은 더욱 그렇다.


죽음 앞에서 회한에 잠기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인이나 광인 외에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거기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은 당신이지만 내일은 내 자신에 대해서 목이 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몰랐었지.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낭비했지.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걸 너무 늦게야 깨닫게 된 거지. 우리는 늘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가련한 존재들이다. 가는 사람도 남아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따스한 가슴마저 슬퍼 보이는 안 그래도 쓸쓸한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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