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샌. 2010. 11. 26. 11:00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만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지난봄 단임골에 갔을 때였다. 꽃순이와 나무꾼은 노래를 부르고는 꼭 “배꼽인사” 라고 말하면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 인상적이었다. 두 손을 공손하게 배꼽에 대고 예의바르게 하는 인사를 배꼽인사라고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배꼽에 손을 얹는 자세가 지극한 겸손의 표현임도 보았다.


시인은 생각할 게 있으면 배꼽에 손이 간다고 한다. 노자 도덕경에 ‘聖人爲腹不爲目’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배[腹]은 근본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배꼽은 배의 중심이다. 생명의 원천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상징기호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기도 하고, 더 넓은 의미로서 우주 생명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배꼽에 손을 댄다는 것은 근본의 자리에 선다는 뜻이다. 겸손히 나를 낮추고 하늘의 소리를 듣겠다는 뜻이다.


배꼽은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는 통로다. 사람들이나 가족, 지상의 그 어느 것도 주지 못하는 따스한 위안이 거기서 나온다. 나도 배꼽에 손을 대고 가만히 귀 기울인다.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그래요, 당신,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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