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샌. 2010. 11. 20. 09:00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 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철없는 마흔이 아니라 이순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말과 정을 제대로 건사하며 사는 게 어렵다. 나이를 제대로 꽃 피운다는 건 항상 무거운 멍에다. 울타리를 넘은 것 같지만 내 안에 더욱 갇힐 뿐이다. 상처는 덧나고 마음은 자꾸 너덜거린다. 그렇게 무너지는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아프고 쓸쓸한 일이다.모두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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