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샌. 2010. 12. 2. 16:14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드디어 오늘 명퇴원에 도장을 찍었다. 평생을 다닌 직장 그만 두는 게 무척 간단했다. 두 장의 종이에 인적사항 적고 도장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홀가분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다. 그리고 뒤통수 맞을 일도 없을 것 같다. 멋지게 사직서를 던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내 결단을 존중하며 기특하게 생각한다. 샌, 너의 선택은 옳은 것이다. 이제 조용히, 그리고 아름답게 사라질 일만 남았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쓸쓸해서 머나먼 / 최승자  (0) 2010.12.08
언젠가는 / 조은  (0) 2010.12.07
청도 가는 길 / 김윤현  (0) 2010.11.30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0) 2010.11.26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0) 201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