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두고 온 것들 / 황지우

샌. 2010. 12. 19. 12:22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어느날 내가 살었는지 안 살었는지도 모를 삶이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 점 배달시키랴?

 

- 두고 온 것들 / 황지우

 

A라고 하는데 전혀 모르겠다. 그러나 환한 얼굴로 다가온 A는 나의 소소한 것조차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같이 자전거 타고 통학했던 기억나지, 주막집 개가 무서워 산 밑 길로 빙 돌아다녔잖아, 넌 사고가 나서 합승을 타고 다니기 시작했고, 차비가 없어 걸어다닌 아이들도 많았는데, 너희 집은 부자였다. 모임에서 낯선 얼굴을 만나는 게 두렵다. 일방적인 기억만큼 미안한 것도 없다. 무슨 한이 있었는지 내 머리에서 옛 기억은 대부분 사라졌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다. 나에게는 무언지도 모른 채 두고 온 것들이 너무 많다.

 

B에게서 수 년 만에 연락이 왔다. 낯선 전화번호였다. 주소록에서 그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힘이 없었다. "나 많이 아팠다." 지금은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 그의 전화를 다시 기다리고 있다. 내가 전화하는 건 두렵다. B 역시 곁이 되어주지 못한 사람들 중의 하나다.

 

돌아보면 난 빚진 게 너무 많다. 세상에 남겨둔 부끄러운 것들이 긴 꼬리를 남기고 있다. 만약 망각에 묻히지 않았다면 회한과 죄책감으로 미쳤을지 모른다. 망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늦은 밤, 길거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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