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틈이 난 벽에 핀 꽃 / 알프레드 테니슨

틈이 난 벽에 핀 꽃 그 갈라진 틈에서 널 뽑았다 여기,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 하지만 너는 무엇인지 뿌리째, 전부,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신(神)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련만 - 틈이 난 벽에 핀 꽃 / 알프레드 테니슨 Flower in the crannied wall I pluck you out of the crannies I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Little flower - but if I could understand What you are, root and all, all in all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 Flower in the Crannied Wall / Alfred Tenn..

시읽는기쁨 2012.11.24

님 / 김지하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저녁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손님 오시거든 마루 끝에서 문간까지 마음에 능라 비단도 널찍이 펼치소서 - 님 / 김지하 얼마 전에 김지하 시인이 이번 12월 대선에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누구는 변절이라고 욕을 했고, 누구는 이제 바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유신 시대 독재의 저항 아이콘으로서 시인이 가지는 상징성이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이니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시읽는기쁨 2012.11.19

일기 /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일기 / 안도현 고맙게도 지인으로부터 안도현 시인이 직접 서명한 시인의 근작 시집 을 선물 받았다. 시인이 서문에서 쓴 대로 '말과 문체를 갱신해 또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는 시집이다. 시인의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읽기 편하면서 가슴에 쉽게 감동이 닿았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를 이리..

시읽는기쁨 2012.11.11

굶주리는 백성 / 정약용

1 우리 인생 풀과 나무와 같아 물과 흙으로 살아간다네. 힘써 일해 땅엣것을 먹고 사나니 콩과 조를 먹고 사는 게 옳건만 콩과 조가 보석처럼 귀하니 무슨 수로 혈기가 좋을쏘냐. 야윈 목은 고니처럼 구부러지고 병든 살은 닭 껍데기처럼 주름졌네. 우물이 있어도 새벽에 물 긷지 않고 땔감이 있어도 저녁에 밥 짓지 않네. 팔다리는 그럭저럭 놀리지만 마음대로 걷지는 못한다네. 너른 들판엔 늦가을 바람이 매서운데 저물녘 슬픈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고을 원님이 어진 정치를 하고 사재(私財)로 백성 구휼한다기에 관아 문으로 줄지어 가 끓인 죽 우러르며 앞으로 나서네. 개돼지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것을 사람이 엿처럼 달게 먹는구나. 어진 정치는 기대도 않았고 사재 털기도 기대치 않았네. 관아의 재물은 꽁꽁 숨겼으니 ..

시읽는기쁨 2012.11.02

나룻물 강생원의 배삯 / 곽재구

나룻물 강생원 젊어서 제월리 나루터의 뱃사공이었지요 남원 장 보러 옥과 입면 사람들 강생원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넜는데요 배가 남원 땅에 다 닿으면 장꾼들에게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봄볕도 좋다 돌아올 때 꽃 한 짐 꺾어 오시오 이를테면 그 말이 곧 뱃삯이었는데 장 보고 오는 동네 사람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 꺾고 살구꽃도 꺾고 수선화꽃이랑 조팝꽃도 실컷 꺾어서는 한아름씩 강생원에게 주었겠지요 한 배 가득 장 보따리와 꽃다발을 싣고 다시 강을 건너며 나룻물 강생원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꽃 좋다 어 참 세상 이쁘다 - 나룻물 강생원의 배삯 / 곽재구 사람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삶이 축제가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바라기 때문에 삶의 핵심을 도리어 놓치는지도 모른다. 나룻..

시읽는기쁨 2012.10.28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라오스나 네팔에 가서 한 달 정도 빈둥거리다 올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을까 봐 제일 걱정이다. 경험 있는 사람은 두려워 말고 그냥 떠나라고 한다. 몸짓 발짓으로도 다 통할 수 있다고......

시읽는기쁨 2012.10.20

무현금 / 박이정

깜깜한 새벽 매미가 화살처럼 쏴 올린 높은 울음 한 줄 통유리창 밖 새벽하늘화선지 한 장을 펼친다 메기고 받고 받고 메기고 끊어졌다 이어지는 맴 매앵~ 맹~ 딩 디잉~ 빗장 풀린 자하문 틈새로 매미의 장삼자락날개가 들썩거린다 성 문 밖 조석고갯길이 파르스름 튀어오른다 인왕산치마바위 꼭대기 하현달 시위가 부르르 떤다 팽팽한 활대를 바짝 당겼다 놓는다 한 평 마당의 고추나무 붉은 별이 세마치장단을 친다 수묵담채빛깔 소리들이 새벽하늘화선지에 변곡선을 긋는다 무현금 가락에 취한 내 숨소리가 오금을 펴고 가느다랗게 일어난다 사박사박새벽새벽 소리 위를 걷는 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황 대 태 협 고 중 유 임 의 남 무 응* 어둠에서 풀려난 하루가 빛살을 켜고 있다 * 한국의 12음계 - 무현금 / 박이정 "당신..

시읽는기쁨 2012.10.16

추포가(秋浦歌) / 이백(李白)

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 秋浦歌 / 李白 길고 길어 삼천장 흰 머리칼은 근심으로 올올이 길어졌구나 알 수 없네 거울 속 저 늙은이는 어디에서 가을 서리 얻어 왔는가 정치적 회오리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고 귀양을 가게 된 이백(李白)은 다행히 사면을 받고 추포(秋浦)에서 지낸다. 이때 그의 나이 59세였다고 한다. 병 들고 늙은 몸으로 낯선 땅에서 지내게 된 시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백발삼천장'으로 유명한 이 시도 그 시기에 씌여졌다. 먼저 길 떠나는 친구를 보면서 인생 덧없음을 절절히 느끼는 계절이다. 살아보니 인생 별 것 아닌 것을.... 이백 선생! 백발이 삼천장이 되든 삼만장이 되든 무슨 대수겠소. 내일이면 한 줌 먼지로 사라지는 것을.... (사족 하나, '백발삼천장'은 ..

시읽는기쁨 2012.10.10

울릉도 / 유치환

동쪽 먼 심해선(沈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만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沈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 울릉도 / 유치환 아직 못 가본 섬들이 많다. 울릉도, 홍도, 흑산도, 백도, 청산도 등등. 외국으로만 눈을 돌릴 게 아니라 내 나라도 찾아가봐..

시읽는기쁨 2012.10.03

박새에게 세들다 / 복효근

감나무 뒤 가까운 담벼락 돌틈 사이 박새 부부 둥지를 틀었나 보다 3월도 중순 너머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안방에 둥지를 트는 것도 아니어서 새소리 몇 가락으로 세를 받기로 하고 새끼 깔 그동안만 전세 내주지 담벼락 앞 감나무 사이 나무 하나 더 심으려 무심코 정말 무심코 오늘 구덩이 하나 파려는데 갑자기 박새 부부 내 앞을 달겨든다 네 집이기도 하지만 내 집이기도 하다 점유권을 주장한다 아차차 그동안 몇 조각 새소리 미리 받아 들었던 게 죄로구나 엉겹결에 구덩이를 포기하고 나무 심기를 포기하고 이 봄을 저 박새 부부에게 맡기기로 하는데 저 부부 정말 전세 등기라도 한 모양 당당해서 아무 말 못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집 나무란 나무 제 식탁으로 대숲 그늘은 제 주방으로 저 하늘 구름은 제 신혼이불로 내 안..

시읽는기쁨 2012.09.27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공감이나 동정을 뜻하는 'empathy'와 연민을 뜻하는 'sympathy'는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엠퍼시'라면, 가슴으로 느끼는 게 '심퍼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사고나 불행한 소식들에 반응하는 감정은 대부분 엠퍼시에 해당한다고 봐야겠다. 이런 엠퍼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간이 사이코패스인지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심퍼시라고 부..

시읽는기쁨 2012.09.22

공갈빵 / 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

시읽는기쁨 2012.09.21

방심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 방심(放心) / 손택수 '방심'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대개 경계하는 뜻으로 쓰인다. 사전을 찾아보니 '긴장이 풀려 마음을 다잡지 않고 놓아 버림'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이라는 두 번째 의미도 있다. '방심하다'라는 말은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시읽는기쁨 2012.09.12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왜 법대생들이 그렇게 좋아했던가 몰라요 고시공부 하는 놈들이 공부는 않고 쫓아다니기만 했으니 아내의 회고담이 또 시작된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고 은근히 으스대는 투다 '법대생'이라는 말도 내 비위에 거슬린다 지금쯤 잘된 놈은 변호사가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지 않겠는가 (하기사 못 된 놈은 복덕방에서 어정거리고 있겠지만) 키는 180도 넘은 멀대같은 놈들이 늘 따라다녔단 말이요 키가 180이라는 말에 또 야코가 죽는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대꾸도 않고 숟가락질만 해댄다 수십 번을 들은 얘기이므로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미련이 있는지 오늘도 점심을 먹다말고 어떤 친구 얘기 끝에 그녀는 자신의 황금시절을 회고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대문 밖에까지 따라와서 어정거리니 어쩌겄오? 다음엔 삼촌이 나와서 쫓아보냈다는 얘기..

시읽는기쁨 2012.09.01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 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 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광주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우연히 후배 B를 만났다. 성체를 영하는 줄에 그가 서 있었다. 그만의 약간..

시읽는기쁨 2012.08.26

이 슬픔을 팔아서 / 이정우

이 슬픔을 팔아서 조그만 꽃밭 하날 살까 이 슬픔을 팔면 작은 꽃밭 하날 살 수 있을까 이 슬픔 대신에 꽃밭이나 하나 갖게 되면 키 작은 채송화는 가장자리에 그 뒤쪽엔 해맑은 수국을 심어야지 샛노랗고 하얀 채송화 파아랗고 자줏빛 도는 수국 그 꽃들은 마음이 아파서 바람소리 어느 먼 하늘을 닮았지 나는 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 하날 살꺼야 저 혼자 꽃밭이나 바라보면서 가만히 노래하며 살꺼야 - 이 슬픔을 팔아서 / 이정우 슬픔이 얼마나 진했으면 시인은 슬픔을 팔아 꽃밭 하나 사고 싶다고 했을까? 슬픔을 살 사람은 없으니, 슬픔이 팔릴 리가 없다는 걸 시인도 잘 알 것이다. 슬픔을 팔겠다는 건 슬픔과 함께 하겠다는 다른 표현이 아닐까. 이때의 슬픔은 처음의 비탄이 아니라, 고운 꽃으로 승화된 슬픔이다...

시읽는기쁨 2012.08.18

가장 사나운 짐승 / 구상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 가장 사나운 짐승 / 구상 지난번 중국에 다녀올 때 공항에서 안내자가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흉기가 아닌가?" 어렸을 때 사랑방에 모인 우리를 보고 할아버지가 물었다. "산..

시읽는기쁨 2012.08.10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 도종환 2009년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이 시가 내 인생에서 꼭 간직하고 싶은 시 1위를 차지했다. 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 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위안과 용기를 주는 이런 시를 찾았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2.07.25

어처구니 / 이종문

온통 난장판인 어처구니 없는 세상, 제일로 그 중에도 어처구니 없는 것은 知天命, 이 나이토록 어처구닐 모른 그 일. - 어처구니 / 이종문 요사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이전되면서 블로그 내용이 엉망이 되었는데, 3천 개가 넘는 글을 하나하나 수정하고 있다. 사진 수백 장이 사라졌고, 글은 줄이 맞지 않고, 띄어쓰기도 제멋대로 되었다. 가장 심각한 건 5천 개가 넘는 태그 단어가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나는 카테고리가 단순해 태그가 아니면 내용 분류를 하기가 어렵다. 태그가 없으면 반신불수 블로그로 변한다. 파란 측에 질의했건만 명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없어진 사진은 자료를 찾아 다시 넣어야 하고, 태그도 일일이 달아줘야 한다. 이 작업만도 몇 달이 걸릴 것이다. 난민..

시읽는기쁨 2012.07.18

시치미떼기 / 최승호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 시치미떼기 / 최승호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두는 인식표였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

시읽는기쁨 2012.07.02

공상 / 구중서

고향 마을 외진 터에 빈집 하나 있을까 종중 땅에 있던 집 맡아서 들어가 헌 데를 황토로 발라 누울 방을 마련할까 흙 마당 울 밑에 아욱이랑 호박 심고 여기저기 나는 잡초 자라게 버려두고 봉당 위 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좋겠네 뒷산의 어느 골짝 샘솟는데 있으련만 물길을 끌어대면 곡수연 터 되려나 도회의 친우가 오면 술잔을 띄워볼까 - 공상 / 구중서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을 산책하다가 만난 시다. 요사이 내 공상과 닮아 반가웠다.어디 외진 터에 낡은 집이라도 있지 않을까 열심히 두리번거리지만 마음을 당기는 데는 아직 없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는 내 앞에 나타나리라. 인적 끊긴 산속에 살다 보면 사람과 사람의 소리가 그리워지기도 할까? 제발 그래 보고 싶다.

시읽는기쁨 2012.06.20

세 가지 선물 / 박노해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은 단 세 가지 풀무로 달궈 만든 단순한 호미 하나 두 발에 꼭 맞는 단단한 신발 하나 편안하고 오래된 단아한 의자 하나 나는 그 호미로 내가 먹을 걸 일구리라 그 신발을 신고 발목이 시리도록 길을 걷고 그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저녁노을을 보고 때로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과 담소하며 더 많은 시간을 침묵하며 미소 지으리라 그리하여 상처 많은 내 인생에 단 한 마디를 선물하리니 이만하면 넉넉하다 - 세 가지 선물 / 박노해 요사이 내 마음도 이렇다. 호미와 신발과 의자로 상징되는 삶을 그리고 있다. 적당한 노동, 그리고 신발과 의자가 뜻하는 동(動)과 정(靜)의 조화로운 삶을 희망한다. 그래서 마음은 늘 전원에서의 삶을 꿈꾼다. 땅과 나무와 풀의 벗들과 가까이서 살고 싶다. 내가 ..

시읽는기쁨 2012.06.11

목돈 /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원을,..

시읽는기쁨 2012.06.02

이모에게 가는 길 / 양애경

미금 농협 앞에서 버스를 내려 작은 육교를 건너면 직업병으로 시달리다가 공원도 공장주도 던져 버린 흉물 공장 창마다 검게 구멍이 뚫린 원진 레이온 건물이 나올 것이다 그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젊은 버스 기사와 야한 차림의 10대 아가씨의 푹 익은 대화를 들으며 종점까지 시골길 골목을 가야 한다 거기서 내려 세 집을 건너가면 옛날엔 대갓집이었다는 낡은 한옥이 나오고 문간에서 팔순이 된 이모가 반겨줄 것이다 전에는 청량리역까지 마중을 나왔고 몇 달 전에는 종점까지 마중을 나왔지만 이제 이모는 다리가 아파 문간까지밖에 못 나오실 것이다 아이고 내 새끼 라고 이모는 말하고 싶겠지만 이제 푹 삭은 나이가 된 조카가 싫어할까봐 아이고 교수님 바쁜데 왠일일까 라고 하실 것이다 사실 언제나 바쁠 것 하나 없는데다가 ..

시읽는기쁨 2012.05.28

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일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 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진보 정당이 시끄럽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요사이가 꼭 그 꼴이다. '통합'의 간판을 내건 지 몇 달도 안 되었다. 너무 잘 난 사람이 많아서인가, 자신의 길만이 옳다는 독단에서 벗..

시읽는기쁨 2012.05.18

지금 여기 / 심보선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자리를 짓..

시읽는기쁨 2012.05.11

화엄 세계 읽다 / 김정원

초가집 그을음 새까만 설거지통 옆에는 항시 큰항아리 하나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설거지 끝낸 물 죄다 항아리에 쏟아 부었다 하룻밤 잠재운 뒤 맑게 우러난 물은 하수구에 흘려보내고 텁텁하게 가라앉은 음식물 찌꺼기는 돼지에게 주었다 가끔은 닭과 쥐와 도둑고양이가 몰래 훔쳐 먹기도 하였다 하찮은 모음이 거룩한 살림이었다 어머니는 뜨거운 물도 곧장 항아리에 쏟아 부었다 그냥 하수구에 쏟아 붓는 일은 없었다 반드시 하룻밤 열 내린 뒤 다시 만나자는 듯 곱게 온 곳으로 돌려 보냈다 하수구와 도랑에 육안 벗어난 존재들 자기 생명처럼 여긴 배려였으니, 집시랑물 받아 빨래하던 우리 어머니들 마음 經도 典도 들여다본 적 없는 - 화엄 세계 읽다 / 김정원 터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마음의 문제란 걸 단임골 다녀온 후 새롭게 ..

시읽는기쁨 2012.05.04

염소 / 맹문재

벚꽃이 어지럽게 떨어진 길을 어미 염소가 타달거리며 가고 있다 그 뒤에는 새끼 두 마리가 아니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총총 따른다 우스꽝스러운 몇 가닥의 턱수염 같은 기침을 가끔씩 내뱉으며 간다 어디를 보더라도 새끼를 데리고 갈 힘이 어미 염소에게는 없다 그리하여 가던 걸음 멈추고 구치소의 아들을 면회하는 아버지 같은 얼굴빛으로 하늘을 쳐다본 뒤 다시 길을 간다 그림자가 그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고 주인을 따르듯 옛날의 어미가 갔던 길을 따라 간다 어미 염소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른다 단지 새끼 두 마리가 아니 열 마리 스무 마리가 뒤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새끼들이 힘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 염소 / 맹문재 인간이 가는 길도 염소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읽는기쁨 2012.04.25

감수성 / 백무산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전재산 십억이 넘는 돈을 모교인 국립서울대학교에 기부하고 갔습니다 살아 계실 때 온화한 모습 그대로 얼마 뒤 부산 사는 진순자(73) 할머니는 군밤장수 야채장사 파출부 일을 하며 평생 모은 일억 팔백만원을 아프리카 최빈국 우간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우리도 굶주려 원조 받아 공부도 하고 학용품도 사고 그랬단다. 우간다 아이들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당부도 담아서 농사짓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의 공부 모임에서 시를 공부하다 나온 얘기였는데 누가 내게 물었습니다 둘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나는 계급성이라고 말하려다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계급적 감수성이라고 말하려다 생명의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수성은 윤리적인 거라고 말하려다 제..

시읽는기쁨 2012.04.17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자연을 거스르면 몸이 운다 몸이 울면 마음도 아프다 아플 땐 멈추고 자연으로 돌아가기 거스르고 무리한 것들 내려놓고 비우기 힘들고 아플 땐 기본으로 돌아가기 새 힘이 차오르도록 그저 비워두고 기다리기 -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그래, 서둘지도 안달하지도 마.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내려놓고 가만히 기다리는 거야. 뭘 기대할 필요도 없어.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때가 되면 다 무르익어가는 거야. 세상살이 잃고 얻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마. 아픈 상처도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낫게 될 거야. 거스르고 무리하지 않기, 비워두고 가만히 기다리기....

시읽는기쁨 2012.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