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공갈빵 / 손현숙

샌. 2012. 9. 21. 08:38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 때를 꼭꼭 챙기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는 거야

 

- 공갈빵 / 손현숙

 

 

공갈빵은 크기는 한데 속은 텅 비어 있는 빵이다. 한 입 베어 물지만 바람만 잔뜩 씹어야 해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알면서 속는 재미가 있다. 이 시의 제목으로 아주 적절해 보인다. 인생은 공갈빵이야, 라는 것 같다.

 

이 시에는 페이소스가 진하게 깔려 있다. 비릿한 삶의 현장 속에 깃든 허전함, 외로움, 애틋함, 따스함 같은 게 느껴진다. 저런 상황에서 시인의 엄마와 같이 대응하는 사람은 요사이는 없을 것이다. 시인도,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를 페미니즘이나 가부장적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버지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부리나케 미리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신바람이 나서 상을 차린 엄마를 시인이 꼭 미운 눈으로만 보는 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누이처럼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을 감사히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이 읽힌다. 인생은 공갈빵일지 몰라도 속이 그냥 텅 비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감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힘인지도 모른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새에게 세들다 / 복효근  (2) 2012.09.27
이른 아침에 / 서정홍  (0) 2012.09.22
방심 / 손택수  (0) 2012.09.12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0) 2012.09.01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0) 2012.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