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이른 아침에 / 서정홍

샌. 2012. 9. 22. 08:56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공감이나 동정을 뜻하는 'empathy'와 연민을 뜻하는 'sympathy'는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엠퍼시'라면, 가슴으로 느끼는 게 '심퍼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사고나 불행한 소식들에 반응하는 감정은 대부분 엠퍼시에 해당한다고 봐야겠다. 이런 엠퍼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간이 사이코패스인지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심퍼시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시인은 괭이 날에 다리가 끊어진 작은 생명을 보며 하루 내내 밥도 먹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는 개구리와 한몸이라는 걸 깊이 체험만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이 아닐까. 여리고 고운 마음씨에 도리어 가슴이 찡하다.

 

시인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태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도 없이 저질러 온 숱한 죄는 씻을 길이 없습니다. 농사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아주 소중한 일이라 여기며 어느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았는데,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간 개구리를 보면서 '그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한쪽 다리가 잘린 개구리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살아 있을까요. 아니면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을까요. 몸통이 반으로 잘린 지렁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땅속에서 온갖 좋은 일을 다 하는 지렁이를 아무 생각 없이 괭이로 찍어 죽였으니..... 내가 살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괴롭히고 죽여야 할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이 시는 <내가 가장 착해질 때>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표제시는 이렇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서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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