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2

감수성 / 백무산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전재산 십억이 넘는 돈을 모교인 국립서울대학교에 기부하고 갔습니다 살아 계실 때 온화한 모습 그대로 얼마 뒤 부산 사는 진순자(73) 할머니는 군밤장수 야채장사 파출부 일을 하며 평생 모은 일억 팔백만원을 아프리카 최빈국 우간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우리도 굶주려 원조 받아 공부도 하고 학용품도 사고 그랬단다. 우간다 아이들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당부도 담아서 농사짓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의 공부 모임에서 시를 공부하다 나온 얘기였는데 누가 내게 물었습니다 둘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나는 계급성이라고 말하려다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계급적 감수성이라고 말하려다 생명의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수성은 윤리적인 거라고 말하려다 제..

시읽는기쁨 2012.04.17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자연을 거스르면 몸이 운다 몸이 울면 마음도 아프다 아플 땐 멈추고 자연으로 돌아가기 거스르고 무리한 것들 내려놓고 비우기 힘들고 아플 땐 기본으로 돌아가기 새 힘이 차오르도록 그저 비워두고 기다리기 -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그래, 서둘지도 안달하지도 마.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내려놓고 가만히 기다리는 거야. 뭘 기대할 필요도 없어.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때가 되면 다 무르익어가는 거야. 세상살이 잃고 얻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마. 아픈 상처도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낫게 될 거야. 거스르고 무리하지 않기, 비워두고 가만히 기다리기....

시읽는기쁨 2012.04.10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도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추억의 ..

시읽는기쁨 2012.04.03

냉이의 꽃말 / 김승해

언땅 뚫고 나온 냉이로 된장 풀어 국 끓인 날 삼동 끝 흙빛 풀어진 국물에는 풋것의 향기가 떠 있는데 모든 것 당신에게 바친다는 냉이의 꽃말에 찬 없이도 환해지는 밥상머리 국그릇에 둘러 피는 냉이의 꽃말은 허기진 지아비 앞에 더 떠서 밀어놓는 한 그릇 국 같아서 국 끓는 저녁마다 봄, 땅심이 선다 퍼주고도 다시 우러나는 국물 같은 냉이의 꽃말에 바람도 슬쩍 비켜가는 들, 온 들에 냉이가 돋아야 봄이다 봄이라도 냉이가 물어 주는 밥상머리 안부를 듣고서야 온전히 봄이다 냉이꽃, 환한 꽃말이 밥상머리에 돋았다 - 냉이의 꽃말 / 김승해 이 시를 읽고 시장에서 냉이를 사와 국을 끓였다. 시장에서 사온 봄은 비닐봉지 속에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래선지 냉이의 향기가 조금은 허전했다. 따스한 햇볕 아래 호미를..

시읽는기쁨 2012.03.25

사랑의 지옥 /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짖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한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 사랑의 지옥 / 유하 어렸을 때 이런 장난 많이 했다. 그때는 호박꽃 속에 갇힌 꿀벌이 재미있었다. 그게 시인의 눈을 거치니 사랑과 결혼의 비유로 되었다. 정말 그럴듯하다. 사랑과 결혼이 뭘까? 불빛으로돌진하는 부나비처럼 남녀는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는 짝짓고 가정을 만들어 자식을 낳는다. 왜 꼭 그래야 하지? 지상의 피조물로서 유전자의 명령..

시읽는기쁨 2012.03.19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2월의 덕소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은 걸. 입 닥치고 강 가운에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피정에 다녀온 아내에게서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옆에 있던 한 분이 2박3일 내내 울기만 하더란다. 나중에 들은 사연은 이랬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사고사였다. 지난 10월의 일이었다. 아들은 고3 수험생으로 수능을 앞두고 있어 누나의 죽음을 알리지도 못했다. 대학..

시읽는기쁨 2012.03.14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 최영미 시인은 한 사랑을 떠나보내고 선운사를 찾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가 4월쯤 되었을까, 뚝뚝 떨어진 선운사 동백꽃을 보았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가어느 날 떠나갔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섭리이듯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걸 모를 리 없건만 서운하고 아쉬운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대가 어찌 꽃이 지듯 쉽게 잊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 왜 그런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떠오른다. 소월의..

시읽는기쁨 2012.03.07

가벼운 농담 / 김동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이면 좋겠어 뻐꾸기 울어대는 산골이면 좋겠어 마루가 있는 외딴집이면 좋겠어 명지바람 부는 마당에는 앵두화 속절없이 벙글고 따스한 햇살 홑청처럼 깔린 마루에는 돌쩌귀처럼 맞댄 아랫도리 열불 나고 뻐꾸기 소리인지 곰팡이 슨 목울대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모를 신음소리에 놀라 장독대 옆 누렁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그대로 마루에 벌렁 누워 아지랑이 몽롱한 한나절 늘어지게 낮잠 자면 좋겠어 그렇게 가벼운 농담처럼 사흘만 - 가벼운 농담 / 김동준 지지난 주 KBS TV '인간극장'에서는 곰배령 아래 강선마을에 사는부부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눈에 묻힌 산골 오지마을에서 때 묻지 않고 동화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부러웠다. 사람은 자신이 걸어보지 못한 길을 선망하게 되는 것 같다.내가 저들 ..

시읽는기쁨 2012.03.02

아침 / 호치민

감옥 벽 위로 해가 떠올라 감옥 문을 비추는구나 감옥 안은 아직 깜깜하지만 바깥에는 땅 위로 햇살이 퍼지네 일어나서 모두 경쟁하듯 이를 잡고 종이 여덟 번 치면 아침 식사 시간 형제여, 나온 것은 다 먹게나 이제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니 - 아침 / 호치민 호치민[胡志明]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중이던 1942년에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길에 경찰에 체포된다. 호치민은 중국 감옥 안에 있는 동안 를 썼는데 그 안에 그가 지은 시가 전한다. 유교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호치민은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문주의자며 시인이기도 했다. 이 시를 보면 그가 낙관주의자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어떤 경우에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고 ..

시읽는기쁨 2012.02.24

노선을 이탈한 버스 / 김선호

블라디보스톡에서 312번 신설동행 버스를 만났다 서울에서 기다릴 땐 좀처럼 오지 않던 노선 버스가 쓸쓸한 바람이 무차별적으로 불어오는 광장에서 말을 걸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자 노선표도 안 뗀 현대자동차 마크가 선명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중곡동과 신설동을 오고가는 순하디순한 글씨 쇄빙선이 깨어 놓은 얼음길을 따라 먼 바다를 건너오느라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다 날을 세운 바람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는 바람 사태에 바퀴는 단단히 부풀어 올랐다 이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불모의 땅으로 강제 이주당한 할아버지의 눈망울처럼 그렁그렁하다 생의 북쪽에 이처럼 따뜻한 기다림이 있냐고 신설동과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버스는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 길이 시작되는 항구 블라디보스톡에서 ..

시읽는기쁨 2012.02.14

별은 다정하다 / 양애경

집에 돌아오며 언덕길에서 별을 본다 별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별은 그저 자기 할일을 하면서 반짝반짝하는 거겠지만 지구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내가 혼자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그렇다 눈에 닿는 별빛이 몇만 년 전에 출발한 것이라든지 그 별이 이미 폭발하여 우주 속에 흩어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든지 보이저가 가보니까 토성의 위성은 열여덟 개가 아니라 사실은 스물한 개였다든지 그런 걸 알아도 그렇다 오히려 나도 다음 生에는 작은 메탄 알갱이로 푸른 해왕성과 얼켜 천천히 돌면서 영혼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좋겠다 싶다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는 작은 사람 같아서 가족의 식탁에 깨끗이 씻은 식기를 늘어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냄비를 가운데 내려놓는 여자 같아서 별은 다정하다 - 별은 다정..

시읽는기쁨 2012.02.06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이면우

배추 무 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뜻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이면우 예순 번의 겨울을 겪으면서 나의 따뜻했던 겨울은 언제였을까.먼 과거,철모르던 유년의 겨울로 돌아가면그 온기 아직 남아있을까.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살게 되었지만 이 겨울은 그리 따스하지 않다. 뭐가 빠져있길래 이리 차고 공허한걸까. 이 시가 그리는 ..

시읽는기쁨 2012.01.31

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들어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시읽는기쁨 2012.01.25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낯익은 사람들이 한둘씩 내린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 않겠다 버둥대다가 우악스런 손에 끌려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웃음을 머금어 제법 여유가 만만하다 반쯤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바깥은 새까맣게 얼어붙은 어둠 열차는 그 속을 붕붕 떠서 달리고 나도 반쯤은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땀내 비린내로 숨막히는 열차 속 새 얼굴들과 낯을 익히며 시시덕거리지만 내가 내릴 정거장이 멀지 않음을 잊고서 -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몇 년 전 직장 건강 검진에서 심전도 검사를 받았는데 이상 소견이 나왔다. 재검사를 받으라는 통보가 왔지만 무시했다. 요사이 겨울 찬 바람 속을걸을 때면 가슴에 통증이 올 때가 있다. 정말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심장 쪽 질병은 대개 급사로 이어진다...

시읽는기쁨 2012.01.15

동안거 / 고재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 동안거(冬安居) / 고재종 겨울이면 깊숙한 숲 속에서 갇히고 싶다. 산골 외딴집에 목화송이 같은 눈이 지붕까지 쌓이면 저절로 안거(安居)에 들 수밖에 없으리라. 지상의 끊어진 길을 반기며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으리. 그렇게 무장무장 하늘로 오르는 길을 꿈꾸리. 한두 달 그렇게 지내면 나에게도 뽀얀 새 살이 돋아나지 않을까. 봄과 함께 연초록 새싹도 피어나지 않을까.

시읽는기쁨 2012.01.08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나이 예순으로 맞는 새해는 무겁다. 하얀 백..

시읽는기쁨 2012.01.01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시장 한구석, 허름한 국숫집을 찾아 한 끼를 때우는 고단한 사람의 굽은 등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빈 그릇을 내려놓는다. 어떤 산해진미보다 ..

시읽는기쁨 2011.12.23

혜화경찰서에서 / 송경동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려 가니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난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인데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청계천 탐엔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사 했고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리곤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트럼펫이나 아코디온도 좋겠지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나를 평가해보겠다고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저 바닷..

시읽는기쁨 2011.12.16

능금 / 김환식

골목시장 앞 날마다 횡단보도를 지키는 할머니의 좌판에서 능금 한 봉지를 샀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를 꺼내 한 입을 베어 문 것뿐인데 갈라진 씨방 속에는 벌레 한 쌍이 신방을 차려놓았다 엄동설한에 어렵게 얻은 셋방일 터인데 먹고 사는 일에 눈이 멀어버린 나는 남의 속사정도 모르는 불청객처럼 단란한 신방 하나를 훼손해 버렸다 - 능금 / 김환식 시인의 마음씨가 따스하다. 사과 대신 능금이라고 한 것도 정겹다. 지금은 능금이라는 말을 거의 안 쓰지만 어릴 때는 사과가 아니라 능금이라고 불렀다. 시인은 굳이 시장 앞 할머니의 좌판에서 능금을 산다. 흠집이 있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일 게다. 한 입을 베어 무는데 속에서 벌레가 나온다. 뭐, 이런 사과를 팔았나,원망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

시읽는기쁨 2011.12.11

사랑 / 고은

사랑이 뭐냐고 문기초등학교 아이가 물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한 나머지 지나가는 새 바라보며 얼버무렸다 네가 커서 할일이란다 돌아서서 후회막급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고 왜 대답하지 못했던가 그 아이의 어른은 내일이 이미 오늘인 것을 왜 몰랐던가 저녁 한천가 한 사내의 낚시줄에 걸려버린 참붕어의 절망이 내 절망인 것을 왜 몰랐던가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 - 사랑 / 고은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두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게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보살피는 것도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랑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랑이란 '공감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타자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슬픔..

시읽는기쁨 2011.12.02

애절양 / 정약용

갈밭 젊은 아낙 오랫동안 울더니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는다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있다 해도 사내가 제 자지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구나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다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다며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간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땅의 자식 거세도 진실로 슬픈 것이거늘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거늘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

시읽는기쁨 2011.11.28

작명의 즐거움 /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싸,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

시읽는기쁨 2011.11.19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 바츨라프 하벨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 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 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도 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 바츨라프 하벨 홍세화 씨가 이 시를 인용하며 진보신당 당 대표에 출마하는 변을 밝혔다. 그분이 당 대표에까지 나서게 된 것이 의외이긴 하지만 작금의..

시읽는기쁨 2011.11.14

아흔여섯의 나 / 시바타 도요

시바타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도우미의 물음에 난처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잘못됐다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웃을 뿐이었습니다 - 아흔여섯의 나 / 시바타 도요 시바타 도요, 1911년에 태어났으니 백 세를 넘었다. 아흔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해서 산케이 신문의 '아침의 시'에 입선되었다. 그리고 시집까지 내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년에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백 세가 넘어서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건보통 축복이 아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싱그러운 감성이 유지된다는 게 기적처럼 보인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스한 관심이 없으면 시는 나오지 않는다. TV에도 가끔 장수 노인이 나오지만 아흔이 넘은 나이에 시를 쓴다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

시읽는기쁨 2011.11.06

시마 / 유용주

그대가 없는 날에도 햇빛은 투명하고 고바우 슈퍼는 문을 열고 우체국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꽃은 피어 바람은 불고 강물은 제 갈 길로 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병원과 약국과 술집과 터미널이 붐비고 붐비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마루는 빗자루와 걸레의 애무를 받고 의자 위로 두툼한 엉덩이들이 내려앉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연못의 물고기들은 은빛 지느러미를 흔들거리고 촛불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깜빡거리고 먼지도 눈을 뜨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시장에선 배추와 무와 하지감자가 바구니 속으로 담기고 돼지와 소들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나가고 알몸둥이의 닭들이 펄펄 끓는 기름솥 속으로 투신을 하고 비듬나물과 상추와 풋고추와 옥수수와 멍게, 해삼, 오징어들이 좌판 위에 진열되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시읽는기쁨 2011.10.31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 고영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에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줄 ..

시읽는기쁨 2011.10.18

때밀이 아줌마는 금방 눈에 뜨인다 / 양애경

때밀이 아줌마는 때를 밀고 있지 않을 때도 금방 눈에 뜨인다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 속에서 검거나 빨간 비키니를 입고 있기 때문일까 안 쓰는 대야를 걷어다 한쪽에 치우고 있거나 좁은 침대에 벗은 여자를 누이고 땀을 흘리며 문지르고 있을 때도 때밀이 아줌마는 다른 여자들과 어딘지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때밀이 아줌마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때를 밀게 하는 여자들이 더 눈에 뜨였다 만삭의 임산부나 시들어 조그매진 할머니가 누워 있으면 마음이 놓였지만 좁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왜소한 때밀이 아줌마에게 살집 피둥한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게으르기도 해라. 제 몸의 때도 제 손으로 못 미나.’ 살짝 끓는 물에 튀겨져 털을 밀고 있는 하얀 돼지 같기도 하고 잔돈푼에 노예를 산 거만한 마나님 같기도 하고 게다가..

시읽는기쁨 2011.10.12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두려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시인의 말처럼 젊었을 때는 마흔이 되고, 쉰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슨 재미로 살까 싶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마흔과 쉰이야말로 인생의 절정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뒷날이 되어 오늘..

시읽는기쁨 2011.10.06

둥근 발작 /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

시읽는기쁨 2011.09.25

어느 노생물학자의 주례사 / 이가림

오늘 새로이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신랑과 신부에게 내가 평생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기생충을 들여다본 학자로서 짧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미잘이 소라게에게 기생하듯이 그렇게 상리공생(相利共生)할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개미와 진딧물, 콩과 뿌리혹박테리아 그런 사이만큼만 사랑을 해도 아주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해삼과 숨이고기처럼 한쪽만 도움 받고 이익을 보는 편리공생(片利共生)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밥이 되는 아름다운 기생충이 되세요 이상 - 어느 老생물학자의 주례사 / 이가림 사랑은 노력과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기술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쉼 없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성에게 끌리는 호기심이나 열정은 사랑이기보다는 연..

시읽는기쁨 2011.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