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2

난 별 본 적 없다 / 학생 작품

회색 숲 속 칙칙이 둘러싼 덤불 따라 걸었다. 터덜대는 발자국 하나 찍힐 때마다 뿌옇게 모래먼지가 너덜거렸다. 이제 간신히 열 여서 일곱. 고개 들어봐도 보이는 건 불 꺼진 하늘이다. 까만 밤하늘은 본 적 없다. 파란 갓등에 불 꺼진 듯 그런 하늘만 봤다. 내가 아는 하늘은 분명 낮에는 퍼렇고 밤에는 까만 하늘이다. 어른들은 늦게 들어가는 우리들 불쌍하고 걱정되니 가는 길에 불 켜둔다 했다. 그 졸렬한 불빛에 하늘이 미간 찌푸리고 구역질할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 돌리는 것, 내가 집 가는 길에 분명히 봤다. 나는 이제 겨우 열 여서 일곱이지만 그래도 하늘에 별 있고 달 있는 건 안다. 원래 밤하늘이 시커멓고 거기에 바늘로 구멍 숭숭 뚫은 것처럼 별 있어야 한단 것도 안다. 어른들은 우리더러 책상 앞에 앉..

시읽는기쁨 2013.07.03

순간의 꽃 / 고은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 봄비 촉촉 내리는 날 누가 오시나 한두 번 내다보았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사진관 진열장 아이 못 낳는 아낙이 남의 아이 돌사진 눈웃음지며 들여다본다 * 부들 끝에 앉은 새끼 잠자리 온 세상이 삥 둘러섰네 * 이 세상이란 여기 나비 노니는데 저기 거미집 있네 * 어린 토끼 주둥이 봐 개꼬리 봐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니 * 위뜸 아래뜸 개가 짖는다 밤 손님의 성(姓) 김가인가 박가인가 * 내려갈 때 보았네 올가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한번 더 살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 설날 늙은 거지 마을 한 바퀴 돌다 태평성대 별것이던가 *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

시읽는기쁨 2013.06.21

그리운 나무 / 정희성

사람은 지가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 가까이 가서 서성대기도 하지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을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 그리운 나무 / 정희성 누군가가 우주를 '색(色)과 욕(欲)'으로 정의한 걸 본 적 있다. '욕(欲)'이라는 단어에서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면, '그리움'으로 바꿔 불러도 좋겠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모든 존재는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나무가 인간을 본다면 얼마나 수선스럽게 보일까? 한 자리에 가만있지 못하고 쉼 없이 돌아..

시읽는기쁨 2013.06.14

백팔배를 올립니다 / 최상호

제 일 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각하며 절합니다. 이 세상 처음 올 땐 인연 따라 온 것일뿐 산 속이든 물 속이든 돌고 도는 순리인즉 한 목숨 누리며 살 때 멈출 자리 봐 둘 일 제 사 배, 나의 진정한 얼은 어디에 있나 생각하며 절합니다. 하늘 뜻 새기는 일 먼 산보며 깨닫는다 땅의 뜻 다지는 일 길 가면서 되새긴다 늘 깨어 바라보는 일 쉬지 않는 이유다 제 십오 배, 하나의 사랑이 우주 전체에 흐르고 있음을 생각하며 절합니다. 달빛을 사랑한 별이 작은 눈을 끔벅이면 한 줄기 바람결이 풍경을 깨우도다 부처도 그윽한 웃음으로 달빛 별빛 모으신다 누구라 해탈한 듯 산속 절집 찾아오고 노스님 죽비 후려 새벽 군불 지피는데 선잠 깬 동자승 혼자 뒤척이며 찾는 엄마 제 십구 배, 생명의 샘물과 우..

시읽는기쁨 2013.06.07

서울의 울란바토르 / 최영미

어떤 신도 모시지 않았다 어떤 인간도 섬기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새처럼 나 홀로 집을 짓고 허무는데 능숙한 나는 유목민. 농경 사회에서 사느라 고생 좀 했지 짝이 맞는 옷장을 사지 않고 반듯한 책상도 없이 에어컨도 김치냉장고도 없이 차도 없이 살았다 그냥. 여기는 대한민국. 그가 들어가는 시멘트 벽의 크기로, 그가 굴리는 바퀴의 이름으로 평가받는 나라. 정착해야, 소유하고 축적하고 머물러야, 사랑하고 인정받는데 누구 밑에 들어가지 않고 누구 위에 올라타지도 않고 혼자 사느라 고생 좀 했지 내가 네 집으로 들어갈까? 나의 누추한 천막으로 네가 올래? 나를 접으면, 아주 가벼울 거야 - 서울의 울란바토르 / 최영미 시인의 신작 시집 에 실린 시다. 최영미 시인하면 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약간은 당돌하..

시읽는기쁨 2013.06.02

사는 기쁨 / 황동규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는 없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뒤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

시읽는기쁨 2013.05.24

장난감 / 타고르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아침 나절을 저렇게 보잘것없이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 같은 장난을 하시네!'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이와 은덩이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감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나 역시 유희를 하고..

시읽는기쁨 2013.05.16

봄 논 / 이시영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봄 논 / 이시영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듣기 좋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 보기 좋다고 옛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논에 들어간 물이 벼를 키우고, 그 곡식이 생명을 기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땅의 차가운 물과 하늘의 뜨거운 불이 만나 나락을 만드는 것이다. 알갱이 하나하나는 곧 물과 불의 결합이다. 어렸을 때는 논두렁을 따라 잘 다녔다. 개울로 놀러 나갈 때는 논두렁을 지나야 했고, 학교에 오갈 때도 지름길이 논두렁이었다. 논두렁을 따라 걸을 때면 그 폭신폭신한 감촉이 좋았다. 좁아서 조심해야 했지만 장난꾸러기들은 일부러 뛰어가는 스릴을 즐겼다. 논두렁에는 한두 개 쯤 물이 ..

시읽는기쁨 2013.05.07

잃어버린 것들 / 박노해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은 방문을 벗어나면 노래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고 나서 택시 기사들마저 모니터를 벗어나면 길눈이 어두워져 버렸다 컴퓨터가 나오고 나서 아이들은 귀 기울여 듣고 기억하고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는 법을 잃어버렸다 자동차 바퀴에 내 두 발로 걷는 능력을 내주고 대학 자격증에 스스로 배우는 능력을 내주고 의료 시스템에 내 몸 안의 치유 능력을 내주고 국가 권력에 내 삶의 자율 권력을 내주고 하나뿐인 삶으로 내몰리면서 나는 삶을 잃어버렸다 - 잃어버린 것들 / 박노해 천지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공이 남쪽으로 초나라에서 유세를 마치고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한음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한 장부가 밭두렁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물길을 내고 우물에 들어가..

시읽는기쁨 2013.04.27

여인의 노래 / 이옥

一結靑絲髮 相期到蔥根 無羞猶自羞 三月不共言 검은 머리 한데 맞대고 하나로 맺어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자고 했지요 부끄럽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부끄러워져 낭군에게 석 달 동안 말도 못했지요 四更起梳頭 五更候公모 誓將歸家後 不食眠日午 4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5경에 어른들께 문안드렸다 맹세하노니, 친정에 돌아간 뒤 먹지도 않고 대낮까지 늦잠 자리라 桃花猶是賤 梨花太如霜 停勻脂與粉 농作杏花粧 복사꽃은 너무 천박하고 배꽃은 너무 쌀쌀맞네 연지분 화장을 잠시 멈추고 살구씨 화장을 하네 歡言自酒家 농言自倡家 如何汗衫上 연脂染作花 당신은 술집에서 왔다고 말하지만 기생집에서 온 줄 전 알아요 어째서 속적삼 위에 연지가 꽃처럼 물들었나요 亂提羹與飯 照我面門擲 自是郎變味 妾手豈異昔 국그릇 밥그릇 마구 집어 내 얼굴을 겨냥..

시읽는기쁨 2013.04.23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워 비 내리고 아침 둥굴레순 그 오래 묵은 새촉이 불쑥 뛰쳐 나왔습니다 올봄도 온 우주의 대답이 이렇듯 간단명료 합니다 -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 친구들과 통음하며 세상의 불의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절망한 뒤 밖에 나선 새벽, 깜깜한 밤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13.04.16

출석 부른다 / 이태선

1번 한우람 정다혜 2번 동사무소 앞 황매화 3번 경비실 옆 철쭉 4번 반지하 방 창문 얼룩 폭우 그친 이튿날 북한산 밑 쌍문1동 교실 반짝반짝 햇빛 선생님 출석 부른다 덥수룩한 어둑발이 쳐들어온다 마루 끝에 앉은 아버지 신을 벗어 턴다 소가 울지 않는다 옆집 도마질 소리 수돗가 펌프 소리 미지근한 수돗물 낮은 부뚜막 하수 냄새 외가의 쪽마루 고양이, 청승 맞게 울던 서울 냄새 멀미 노란 눈 속으로 고요히 골목 연탄 냄새 네 네 네 깊게 깊게 맑은 폭우 그친 다음 날 한우람 정다혜 뜸부기 소쩍새 세상 만물 대답한다 반짝 반짝 담벼락의 벽보도 내 마음의 얼룩도 - 출석 부른다 / 이태선 지난 주말에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봄 심술이 심했다. 오늘 아침은 햇빛 선생님 환한 얼굴로 출석부를 들고 들어오신다..

시읽는기쁨 2013.04.08

병에게 /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시읽는기쁨 2013.04.01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자기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 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 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 때고 꽃잎에 이슬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 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 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으로 들기로 한다 자기, 사랑에 빠진 말 속에 -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시가 전하는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무척 재미있다. 보험서류를 들고 옛날 여자후배가 찾..

시읽는기쁨 2013.03.24

쓸쓸 / 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 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

시읽는기쁨 2013.03.18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소총으로 쏘아 진흙 밭에 빠뜨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퍽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들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네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남북한이 ..

시읽는기쁨 2013.03.13

낯선 곳 / 고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 낯선 곳 / 고은 그랜드 캐니언을 보고 싶어 아메리카로 간다.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의 국어 시간, 교과서에 실린 천관우의 그랜드 캐니언 기행문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다짐했었다. 언젠가 나도 그랜드 캐니언에 설 것이라고. 그 꿈이 이제 실현되려 한다. 이번 패키지여행에는 캐나디안 로키도 ..

시읽는기쁨 2013.02.21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나와 너, 생과 멸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지다. 지극한 무위(無爲)며 공(空)이다. 머리가 멍해진다. 부처님 말씀하셨다. "나고 없어짐 벗어나면 고요한 그곳이 즐거움이 된다[生滅滅已 寂滅爲樂]." 흰 눈 덮이는 고요한 밤에 달빛만 교교하다. 적멸(寂滅)을 위하여....

시읽는기쁨 2013.02.15

내 귀는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는가 / 이진명

한 선방(禪房) 승(僧)의 아무 고저장단 없는 먼, 마른 목소리의 첫째 이야기를 듣는다 말도 없이 출가해 수년 후 정식 비구계를 받고 고향집 양친을 찾아 갔노라고 50줄 아버지가 오늘 나랑 함께 자자며 이부자리를 펴시는데 중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안 잡니다 쌀쌀맞게 내뱉고는 다른 방에서 잤노라고 한 선방 승의 찬 하늘 구만리를 가는 기러기라도 배웅하는 듯, 젖힌 고개의 둘째 이야기를 듣는다 누나가 미국으로 이민간다고, 공항에서라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전갈온 적 있었노라고 절방 마루 끝에 서서 비행기 출발했겠구나 산문 밖이나 건너다 보았노라고 누나 아이가 둘이라는데 그 조카들 얼굴도 모르고 한 선방 승의 고저장단 없는 먼, 마른 목소리의, 이번에는 아주 작은 웃음기가 입가에 짧게 머문 셋째 이야기를 ..

시읽는기쁨 2013.02.07

맘과 허공 / 류영모

마음이 속에 있다고 좇아 들어 못 봤거늘 허공이 밖에 있대서 찾아 나가 만날 손가 제 안팎 모르는 임자 아릿다운 주인인가 온갖 일에 별별 짓을 다 봐주는 맘이요 모든 것의 가진 꼴을 받아주는 허공인데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하나인 법 싶구먼 제 맘이건 쉽게 알고 못되게 안 쓸 것이 없이 보고 빈탕이라 망발을랑 마를 것이 님께서 나드시는 길 가까움직 하구먼 - 맘과 허공 / 류영모 다석 류영모 선생은 56세 때인 1946년부터 30년 가까이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3천 수 가까운 한시와 시조가 들어있다. 이 시조도 그중 한 편이다. 선생은 공(空)을 만물의 근본이며 존재의 바탕으로 보았다. 이 우주의 참된 실재는 물질이 아니라 공, 즉 빔이다. 마음이 공과 하나되어 공색일여(空色一如)의 자유에 이르는 게 깨..

시읽는기쁨 2013.02.01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 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

시읽는기쁨 2013.01.29

한 수 위 /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편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

시읽는기쁨 2013.01.24

겨울 냉이 / 고명수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더듬더듬 찾아내어 검불을 뜯어낸다 봄 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가파른 삶의 벼랑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냉이를 보라 서슬 푸른 정신으로 살아야 하리라 서슬 푸른 눈으로 살아야 하리라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온몸을 우려내어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엔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서원 돌담길에도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에도 숨어있을 냉이, 환한 한 마디의 말씀이 오랜 궁리와 연찬에서 솟아나듯이 청빙(淸氷)을 뚫..

시읽는기쁨 2013.01.17

무등 / 황지우

山 절망의산, 대가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회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 무등(無等) / 황지우 무등산에 오르기 위해 내일 남쪽으로 간다. 대선 끝나고 술을 마시다가 문득 무등산이 생각났다. 찾아가고 싶었다. 그 이름만으로 만나고 싶었다. 무등(無等)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이기에 슬픈 이름이..

시읽는기쁨 2013.01.08

팔원(八院) /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팔원(八院) / 백석 동장군 기승이 대단하다. 지난 12월은 45년 만의 강추위였다. 새해가..

시읽는기쁨 2013.01.03

조대(釣臺) / 대복고(戴復古)

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平生誤識劉文淑 惹起虛名滿世間 - 釣臺 / 戴復古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싯대라 삼공 벼슬 준다 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 날려 온 세상에 퍼쳤구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BC 4 ~ AD 57)가 어지러워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천하가 제 손아귀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복종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동문수학한 엄자릉(嚴子陵)이었다. 자신은 선비의 길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엄자릉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하를 부춘산(富春山)에 보내 냇가에서 낚시질하는 엄자릉을 데려오게 하였다. 대신들이 늘어선 사이를 엄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제 자리..

시읽는기쁨 2012.12.29

물맛 / 장석남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 물맛 / 장석남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을 때 물맛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으리라. 노자 선생은 '무미지미(無味之味)'를 최고의 맛으로 쳤다. 물맛이 바로 그 '맛 없음의 맛'이다. 맛도 없고 향기도 없는, 담박하고 탈색된, 인생의 내리닫이에서 이제는 훤칠한 물맛이 되고 싶다.

시읽는기쁨 2012.12.22

무당벌레 / 김용택

아랫도리를 발가벗은 아가가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쪼그려 앉더니 뒤집어진 무당벌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듭니다. 무당벌레가 뒤집어지더니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갑니다. 아가가 우우우우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무당벌레를 가리키다가 자기 손가락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 무당벌레 / 김용택 어린아이는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었다고 여긴다. 하늘의 구름과 내리는 눈은 살아있지만, 정원의 꽃나무는 죽은 것이다. 뒤집어져 움직이지 못하던 무당벌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은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자기 손가락이 닿으니 그렇게 되었다. 모든 것이 경이 그 자체다. 어린아이는 사물 사이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하다고 부를 수도 있고, 순수..

시읽는기쁨 2012.12.16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사랑했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 그것은 너나 나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로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마음이 보이는 거울이 있다면 어떨까?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마음이 보이..

시읽는기쁨 2012.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