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겨울 냉이 / 고명수

샌. 2013. 1. 17. 08:34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더듬더듬 찾아내어 검불을 뜯어낸다

 

봄 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가파른 삶의 벼랑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냉이를 보라

서슬 푸른 정신으로 살아야 하리라

서슬 푸른 눈으로 살아야 하리라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온몸을 우려내어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엔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서원 돌담길에도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에도 숨어있을 냉이,

환한 한 마디의 말씀이

오랜 궁리와 연찬에서 솟아나듯이

청빙(淸氷)을 뚫고

겨울 냉이는 자란다

아니 자라야 한다

 

- 겨울 냉이 / 고명수

 

 

일주일 전 무등산에서 겨울 냉이를 보았다. 눈 사이에서 진한 초록색 잎을 내밀고 있었다. 추워서 있는 옷을 다 껴입고도 종종걸음을 치는 우리를 냉이는 빙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어야 할 계절에 냉이는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다. 자기 단련의 칼날 위에 선다. 깊어진 향이 사람의 손길을 탄다는 걸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누군가의 식탁에서 시원한 국물로 온몸 보시를 한다. 청빙(淸氷)을 뚫고 자라는 겨울 냉이를 보며 나는 나한테 말한다. "세상 끝날 듯 엄살을 부리는 사람아, 저 겨울 냉이를 보라!"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수 위 / 복효근  (0) 2013.01.24
호주머니 / 윤동주  (0) 2013.01.20
무등 / 황지우  (0) 2013.01.08
팔원(八院) / 백석  (0) 2013.01.03
조대(釣臺) / 대복고(戴復古)  (0) 2012.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