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어떤 관료 / 김남주..

시읽는기쁨 2011.08.26

병산습지 / 공광규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모래 위에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 놓았네요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 폭입니다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검은제비꼬리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앉았다가는 실망했는지 이내 날아갑니다 가끔 소나기가 갯버들 잎을 밟고 와서는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깔아놓겠지요 그러면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발자국 매화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그런 밤에는 달도 빙긋이 웃겠지요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발자국 매화꽃잎에 위에 똥을 싸 놓고서는 그걸 매화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 병산습지 / 공광규 검암습지, 마애습지, 풍산습지, 구담습지, 지보습지, ..

시읽는기쁨 2011.08.18

착한 시 / 정일근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 착한 詩 / 정일근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앞 시내는 물도 맑았고 고기들..

시읽는기쁨 2011.08.11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

시읽는기쁨 2011.08.04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무슨 생각하나요 / 황진이

蕭寥月夜思何事 寢宵轉輾夢似樣 問君有時錄忘言 此世緣分果信良 悠悠憶君疑未盡 日日念我幾許量 忙中要顧煩惑喜 喧喧如雀情如常 - 蕭寥月夜思何事 / 黃眞伊 달 밝은 밤에 그대는무슨 생각하나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나요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나요 이승에서의 우리 인연이 행복한가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에 내 생각은 얼마만큼하나요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 달 밝은 밤에 그대는무슨 생각하나요 / 황진이 황진이가 당대의 뛰어난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고 풍류를 즐겼지만 진실로 사랑했던 사람은 소세양(蘇世讓)이었다고 한다. 소세양은 황진이가 절색이라는 풍문을 듣고는 자신은 한 달만 같이 살고미련없이 헤어질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황진이..

시읽는기쁨 2011.08.03

여게가 도솔천인가 / 문성해

칠성시장 한켠 죽은 개들의 나라로 들어선다 누렁개, 흰 개 할 것 없이 검게 그슬린 채 순대처럼 중첩되어 누워 있는 곳 다 부질없어라. 살아서 쏘다녔던 거리와 이빨을 드러내던 증오 쓰레기통 뒤지던 욕망들이 결국은 이 몇 근의 살을 위해 바쳐진 것이라니. 뒹구는 눈알들은 바라본다 뿔뿔이 흩어져 잘려 나가는 팔다리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날렵하게 춤추는 저 검은 칼을, 이제는 검은 길을 헤매 다니는 일은 없을 거야 발길에 차여 절뚝거리는 일도 마음에도 없이 꼬리 흔드는 일은 더더욱... 좌판들 위에서 꾸덕꾸덕해진 입술들이 웃는다 이제는 물고 뜯는 일 없이 한통속이 된 검은 개들의 나라에서 살아서 오히려 근심 많은 내가 거추장스런 팔다리 휘적이며 걸어간다. - 여게가 도솔천인가 / 문성해 여름으로 접어들 ..

시읽는기쁨 2011.07.24

수박 / 이성복

여름날 오후 뜨거운 언덕바지를 타고 아파트로 가는 길엔 어른이나 아이나 제 머리통보다 큰 수박 하나씩 비닐끈에 묶어들고 땀 흘리며, 땀 닦으며 정신없이 기어오른다 그들이 오르막길에서 허우적거릴 땐 손에 달린 수박이 떼구르르 구를 것도 같고, 굴러내려 쇠뭉치로 만든 공처럼 땅속 깊이 묻혀버릴 것도 같지만 무사히, 무사히 수박은 개구멍 같은 아파트 현관 속으로 들어간다 그럼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선 끈에 묶인 수박을 풀고 간단히 씻은 다음, 검은 등에 흰 배의 고등어 같은 부엌칼로 띵띵 부은 수박의 배를 가르면, 끈적거리는 단물을 흘리며 벌겋게 익은 속이 쩍, 갈라 떨어지고 쥐똥 같은 검은 알이 튀어나온다 그러면 저마다 스텐 숟가락을 손에 쥔 아버지와 할머니, 큰아이와 작은놈, 머리를 뒤로 묶은 딸아..

시읽는기쁨 2011.07.16

평온한 삶 / 포프

물려받은 몇 마지기 땅 외엔 더 바랄 것도 더 원할 것이 없고 제 땅에 서서 고향 공기를 들이마시며 흡족한 자는 행복한 사람 소 길러 우유 짜고 밭 갈아 빵을 얻고 양떼 길러 옷 만들고 나무에서 여름철엔 그늘을 겨울철엔 땔감을 얻네 날마다 조용히 근심걱정 모르고 매순간, 매일, 매년을 스쳐보내는 건강한 육신, 평온한 마음을 가진 자는 복 받은 사람 밤에는 편히 자고, 배우다 때로 쉬니 더불어, 상쾌한 여유로움 그 순박함은 고요한 명상과 더불어 더욱 흐뭇해지네 나 또한 이처럼 흔적 없이 이름 없이 살다 미련 남기지 않고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구나 내 누운 곳 말해줄 비석조차 하나 없이 - 평온한 삶 / 알렉산더 포프 Happy the man whose wish and care A few paternal..

시읽는기쁨 2011.07.09

크나큰 수의 / 김왕노

어머니 요양원에 계신다. 요양원에 가면 둘째 시인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나 미안하지 말라고 병들고 늙으면 요양원에 있는 것이 어머니 편하고 자식들 다 편한 일이라며 누누이 말하지만 요양원이 현대식이라 위생적이고 넓고 의료시설 잘 갖춰진 곳이지만 집에 모시고 조석으로 문안드리지 못하는 마음이 요양원에 면회 갔다 올 때마다 무릎이 세상 모서리에 부딪친 듯 생채기 하나 둘 늘어난다. 늙어도 어머니 욕심이 없을까? 어머니와 친한 할머니 자식이 비싸고 질 좋은 수의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날마다 자랑이라고 해서 어머니가 죽으면 뭐 입고 자시고 알기나 아나, 그냥 구름이니 새벽이니 바람이니 햇살이니 다 크나큰 수의라고 여기며 그보다 더 큰 행복 없다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선소리처럼 앞세우..

시읽는기쁨 2011.07.04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전미정 님의 ‘상처’에 대한 아래 글을 읽는 것으로 시 감상에 대신한다. 상처는 마술이다. 그렇게 흉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꽃처럼 피어 살랑거리고 있으니까. 젊은 날에는 들킬 새라 그렇게 숨겨두던 상처가 다른 모습으로 승화되니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다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되면 서로들 상처 하나씩을 꺼내어 보여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처가 피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다는 이..

시읽는기쁨 2011.06.29

비로소 / 고은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 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비로소 / 고은 짧고 쉽다. 누구나 쓸 것 같으면서도 아무나 쓸 수 없다. 인생의 한 경지에 들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노래다. 시인의 다른 시 '그 꽃'이 떠오른다. '내려갈 때 / 보았네 / 올라갈 때 / 보지 못한 / 그 꽃'. 잃어야 얻을 수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만 나아갈 때 주위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노를 놓쳤을 때 비로소 넓은 물이 보인다. 구름이 보이고 돛단배도 보인다.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이 물로 보인다. 지금 내가 젓고 있는 노는 무엇인가? 정신 없이 노를 저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읽는기쁨 2011.06.23

연장론 / 김나영

다 꺼내봤자 세치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아이 눈에 박힌 티끌 핥아내고 한 남자의 무릎 내 앞에 꿇게 만들고 마음 떠난 애인의 뒤통수에 직사포가 되어 박히던, 이렇게 탄력적인 연장이 또 있던가 어느 강의실, 이것 내두른 대가로 오 만원 받아들고 나오면서 궁한 내 삶 먹여 살리는 이 연장의 탄성에 쩝! 입맛을 다신다 맛이란 맛은 다 찍어 올리고 이것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덕분에 내 몸 거둬 먹고 살고 있다면 이처럼 믿을만한 연장도 없다 궁지에 몰릴 때 이 연장의 뿌리부터 舌舌舌 오그라들고 세상 살맛 잃을 때 이 연장 바닥이 까끌까끌해지고 병에서 회복될 때 가장 먼저 이 끝으로 신호가 오는 예민한 이 연장,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사마천은 이것 함부로 놀려서 궁형의 치욕을 한비자는 민첩하게 사용 못한 죄로 사약..

시읽는기쁨 2011.06.15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한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시읽는기쁨 2011.06.07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화사한 라일락처럼 피어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싱싱한 웃음 몇 개를 준비해 두는 일 비가 샌 내 몸을 감쪽같이 도배하는 일 안개에서 빠져 나와 샤워하고 아, 분주해라 곰팡이 슨 그리움 한쪽도 시치미 떼며 감춰 두는 일 그가 묻더라도 내 가슴에 키운 돌미나리 몇 뿌리는 비상금처럼 숨겨두자 그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내 몸이 성냥갑이란 걸 감추고 있는 불이란 것도 절대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그가 내 곁에 포근한 산 그림자처럼 쓰러져 누웠을 때 잊었던 봄! 물푸레나무 푸른 잎사귀로 퍼덕퍼덕 되살아날까? 그런데, 그런데 그가 참았던 봄을 한꺼번에 터트려 오면 어떡하지? 난. -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후생에 다시 산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세상을, 사랑을..

시읽는기쁨 2011.06.01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 이정록

갓 깨어난 새들과 시소 놀이해봤냐고 어린 나뭇가지들이 우쭐거리기 때문이다 잠든 새들 깨우지 않으려 이 악문 채 새벽바람 맞아본 적 있냐고 젊은것들이 어깨를 으쓱거리기 때문이다 겨울잠 자는 것들과는 술래잡기하지 말라고 굴참나무들이 몇 개월째 구시렁거리기 때문이다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애벌레들의 발가락 때문에 간지러워 죽겠는데 꽃까지 피었으니 벌 나비들의 긴 혀를 어쩌나 가을 되면 겨드랑이 찢어질 텐데 어쩌나 어쩌나 철부지들이 열매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 허튼 한숨에 다람쥐며 청설모들이 입천장 내보이며 깔깔거리기 때문이다 딱따구리한테 열 번도 더 당하곤 목젖에 새알이 걸려 휘파람이 샌다고 틀니를 뺐다 꼈다 하는 늙다리 소나무 때문이다 딱따구리는 키스를 너무 좋아해, 나이테깨..

시읽는기쁨 2011.05.24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내 친구 재운이 마누라 정문순 씨가 낀 여성문화 동인 살루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이쿠, 했다 나도 앉아서 오줌 눈지 벌써 몇 년, 제발 변기 밖으로 소변 좀 떨구지 말아요 아내의 지청구에, 제기럴 앉아서 오줌 싸는 거 습관이 된 지 벌써 수삼 년, 날마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나는 진화론을 곱씹는다 이게 퇴화인가 진화인가 퇴행인가 진행인가 언젠가 여자들이 더 많은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서영은 배를 잡고 웃고 강현덕은 그것이야말로 진화라고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역시 여자는 새침데기들이 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강정구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난 앉아서 오줌 싸니까 방귀가 잘 뀌어지던데, 낄..

시읽는기쁨 2011.05.18

곡강이수 / 두보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만점 꽃잎이 바람에 날리니 참으로 시름에 잠기네 봄을 마음껏 보려고 하나 꽃잎은 눈을 스치고 지나가니 어찌 몸이 상할까 두렵다고 술을 마시지 않으리 강가 작은 정자에는 비취새가 둥지를 틀었고 부용원 뜰가 높은 이들 무덤에 기린 석상도 뒹구는구나 세상이치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즐거움을 따를지니 어찌 헛된 영화에 이 한 몸 얽맬 필요가 있으랴 조회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매일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오네 얼마 안 되는 술빚은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살이 칠십년 살기는 예부터 드문 일이라네 꽃 사이를 맴도는 호랑나비는 꽃 깊숙이 숨어 있고 강물 위를 스치는 물잠자리는 유유히 나는구나 전해오는 말로 아름다운 경치도 모두 흘러가는 거라 하니 잠시나마 서..

시읽는기쁨 2011.05.02

꽃 심는 즐거움 / 이규보

꽃 심으면 안 필까 걱정하고 꽃 피면 또 질까 걱정하네 피고 짐이 모두 시름겨우니 꽃 심는 즐거움 알지 못해라 - 꽃 심는 즐거움 / 이규보 種花愁未發 花發又愁落 開落摠愁人 未識種花樂 - 種花 / 李奎報 인생사 자질구레한 일들 탈도 많다. 뜻대로 되기보다는 일마다 어그러지기 일쑤다. 주룩주룩 비 오는 날에는 놀러갈 약속 생기고, 개었을 때는 대부분 할 일 없이 지낸다. 배불러 상 물리면 맛있는 고기 생기고, 목 헐어 못 마실 땐 술자리 벌어진다. 귀한 물건 싸게 팔자 물건 값이 올라가고, 오랜 병 낫고 나니 이웃에 의원 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는 다른 시에서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이렇게 한탄했다. 그의 시는 엄살기가 있다 하나 허세를 부리거나 현학적이지 않아서 좋다. 늑대를 피해서 도망간 것이 ..

시읽는기쁨 2011.04.25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 김영남

벚꽃 소리 없이 피어 몸이 몹시 시끄러운 이런 봄날에는 문 닫아걸고 아침도 안 먹고 누워있겠네 한 그리움이 더 큰 그리움을 낳게 되고... 그런 그리움을 누워서 낳아보고 앉아서 낳아보다가 마침내는 울어버리겠네 소식 끊어진 H를 생각하며 그러다가 오늘의 그리움을 어제의 그리움으로 바꾸어보고 어제의 그리움을 땅이 일어나도록 꺼내겠네 저 벚꽃처럼 아름답게 꺼낼 수 없다면 머리를 쥐어뜯어 꽃잎처럼 바람에 흩뿌리겠네 뿌리다가 창가로 보내겠네 꽃이 소리 없이 사라질까 봐 세상이 몹시 성가신 이런 봄날에는 냉장고라도 보듬고 난 그녀에게 편지를 쓰겠네 저 벚나무의 그리움으로 -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 김영남 여의도 벚꽃길에 200만이 모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창경원 벚꽃구경이 유행이었는데 이젠 여의도로 옮겨갔다. 소..

시읽는기쁨 2011.04.17

이상하다 / 최종득

외할머니가 고사리와 두릅을 엄마한테 슬며시 건넵니다. "가서 나물 해 먹어라. 조금이라서 미안타." "만날 다리 아프다면서 산에는 뭐하러 가요. 내가 엄마 때문에 못살아요." 늘 주면서도 외할머니는 미안해하고 늘 받으면서도 엄마는 큰소리칩니다. - 이상하다 / 최종득 고등학생일 때였다. 외할머니가 부모님 고생 하시는 걸 꺼내며 나중에 은혜를 갚으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어느 때인가는 그게 듣기 싫었던가 보다. 아마 이렇게 쏘아붙였던 것 같다. "세상 부모들 다 그렇게 고생하거든요. 나도 자식한테 똑 같이 할 거구요." 결국 그 말이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아무 말씀 안 하셨지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식이 부모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결혼하고 자식 낳으면 ..

시읽는기쁨 2011.04.10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 신현림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 신현림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가 있었다. 10년 주기 정도로 교체되는 전자제품이야 그렇다 쳐도 어떤 선택은 평생을 가고 운명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삶은 과거에 내가 행한 선택의 결과이다. 원인 없는 불행은 없다. 흘러간 물은 주워담..

시읽는기쁨 2011.04.04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어부 / 김종삼 새벽에 잠이 깼다. 속이 쓰리다. 날카로워진 감정의 불꽃이 화약고를 건드렸다. 폭발이 일어났다. 제기럴,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는 건가. 너희들에게 보이기 싫어 책상에 엎드려 속울음을 삼켰다. 어린 자식 앞에서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사람과 희망에 대해 믿지 않기로 했다. 항복하지요. 이젠 당신에게 바칠 희생제물도 남아 있지 않아요. 나는 날마다 출렁거린다. 봄 가운데서 북풍한설을 걱정한다. 두렵다. 그리고 미안하다. 견뎌야지. 시간이..

시읽는기쁨 2011.03.30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송경동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

시읽는기쁨 2011.03.23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존 던

사람은 누구든 섬은 아니리, 온전한 자체로서. 각각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리라. 만일 모래톱도 그리되면 마찬가지. 마찬가지리라 만일 그대의 땅이나 친구가 그리되어도. 어느 사람의 죽음이 나를 작게 만드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알려고 보내지 마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존 던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시읽는기쁨 2011.03.18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 이기철

나팔꽃 새 움이 모자처럼 볼록하게 흙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두렵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따뜻해질까 두렵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저 추운 가지에 매달려 겨울 넘긴 까치집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이 도시의 남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둑엔 벼룩나물 새 잎이 돋고 동쪽엔 살구꽃이 피고 서쪽엔 초등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북쪽엔 공장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서문시장 화재에 아직 덜 타고 남은 포목을 안고 나오는 상인의 급한 얼굴을 보면 찔레꽃 같이 얼굴 하얀 이학년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 눈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 석상..

시읽는기쁨 2011.03.11

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

시읽는기쁨 2011.03.04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습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 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웅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

시읽는기쁨 2011.02.27

어떤 기쁨 / 고은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했던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하고 있는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막 생각하려는 것 울지 마라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세계에서 이 세계의 어디에서 나는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수많은 남과 남으로 이루어졌다 울지 마라 - 어떤 기쁨 / 고은 오늘 저녁 SBS의 '내 마음의 쉼표'에 고은 선생이 출연하셨다. 선생이 10대 후반 시절 6.25를 피해 선유도로 피난 가셨는데 60년이 지난 지금 그곳으로 다시 추억 여행을 하시는 내용이었다. 선생의 소년 같은 해맑은 미소와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TV를 보면서 나에게도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

시읽는기쁨 2011.02.21

산꽃 이야기 / 김재진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가령 산딸기가 하는 말이나 노각나무가 꽃 피우며 속삭이는 하얀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톱 한 자루 손에 들고 숲길 가는 동안 떨고 있는 나무들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꿈틀거리며 흙 속을 사는 지렁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제는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늑대의 눈 속으로 벅차오른 산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와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의 그 많은 창문들 하나하나 열어 볼 수 있다면 휘영청 달뜨는 밤 산꽃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 산꽃 이야기 / 김재진 라는책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대학교에 다닐 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식물도 인간과 같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생각도 한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지금도 책 제목이 생각나는 걸 보면 당..

시읽는기쁨 2011.02.19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 이형기 '이제 3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합니다. 스스로 원한 것이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쉽고 허전한 마음 역시 숨길 수 없습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싸웠던 시간들, 보람도 있었지만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도 많았습니다. 뒤돌아보니 좋았던 일보다는 후회되고 자책되는 일들이 더 많이 떠오..

시읽는기쁨 201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