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샌. 2011. 6. 7. 12:57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한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시인이 쓴 산문집 <김선우의 사물들>을 읽고 있다. 숟가락, 거울 등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평범한 스무 가지 사물들 이면의 이야기를 전하는 책이다. 사물을 빌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이 시에서 느끼는 이미지와 비슷한데 ‘여성’과 ‘생명’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것 같다.

이 시에 나오는 오동나무는 여성을 상징한다.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시집 갈 때는 그 오동나무로 장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 오동나무는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고향집 밭에 오동나무가 있는데 밭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자주 잘라준다. 그러나 다음 해에는 잘라진 줄기에서 다시 가지가 돋아나 처음처럼 무성해진다. 여성과 오동나무는 원초적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여성성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찬미 받아야 마땅하다. 가부장적 사회체제에서 당연시된 사회 통념을 거부하는 이 시는 밝고 유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