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샌. 2011. 6. 29. 08:43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전미정 님의 ‘상처’에 대한 아래 글을 읽는 것으로 시 감상에 대신한다.

 

상처는 마술이다. 그렇게 흉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꽃처럼 피어 살랑거리고 있으니까. 젊은 날에는 들킬 새라 그렇게 숨겨두던 상처가 다른 모습으로 승화되니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다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되면 서로들 상처 하나씩을 꺼내어 보여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처가 피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다는 이야기. 그것은 저마다의 천일야화이다. 묘하게도 상처 없는 천일야화는 흥미롭지도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상처는 더 이상 흉터가 아니라 보석이 된다. 그 보석을 얻기 위해 애면글면 살아온 양 저마다 빛나는 상처 한 송이씩 내달고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 입은 누군가를 직감적으로 알아본다. 상처를 입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상처 입은 마음을 단번에 관통할 능력이 없다. 또한 상처가 아문 사람만이 마음이 상하고 찢긴 타인을 품을 수 있다. 지난날의 상처를 성숙하게 이겨낸 사람만이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상처 입은 누군가를 끌어안을 때 상처는 치유로 전환된다. 상처가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되어 결합하는 그 지점에서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가 들수록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친근감이 느껴진다. 정확하게는 상처를 삭여 꽃으로 피워낸 이들에게 마음이 먼저 가 닿는다. 저마다 머금고 있는 상처의 고유한 빛깔과 맛은 달라도, 상처만큼 인생의 식욕을 자극하는 향료도 없다.

 

살아오면서 나를 넘어지게 했던 상처들이 이제는 스스로를 일으키고, 넘어진 이웃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꼴찌이기에 겪어야 했던 상처를 내 것이 아니라고 치부한다면 상처는 썩어서 사람들 사이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리라. 하지만 그 상처가 내 것이려니 하고 끌어안는 순간, 상처는 꽃으로 피어나 향기를 퍼뜨리게 된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상처들이 익기 시작했는지 제법 향기를 내고 있는 듯하다. 그 아문 상처들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니 말이다. 치유의 여정 위에서 인생은 만개하니까. 인생의 성자(成者)는 상처를 자궁삼아 잉태되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의 행복도, 불행도 타인과의 소통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원치 않는다 해도 우리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지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에게 또 하나의 중력이 있다면 그것은 ‘더불어 산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서로로 인해 그렇게 고통 받고 힘겨워하면서도 본능처럼 더불어 살아가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사랑의 공동체를 향해 진화해 가야 한다고 말한 샤르댕의 통찰은 언제나 무릎을 치게 만든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수용하고 감싼다는 뜻이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진정한 사랑을 시작하면 자신의 불행과 상처를 재활용할 기회를 선사받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도 상처 입은 사람이고, 너도 상처 입은 사람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상처도 사랑해야 하고 타인의 상처도 사랑해야 한다. 앙갚음하는 심정으로 오기를 부리며 살아왔더라도, 사랑으로 그 상처가 숙성되고 부드러워진다면 끝내 누군가의 삶의 혀끝을 향긋하게 자극해 주리라. 상처와 더불어 사는 맛은 뜻밖에도 감미롭다. 그 맛은 달콤 쌉싸래하다. 그리고 성숙한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진정한 달콤함은 쓴맛이 주는 자극 속에 녹아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인가 살아가면 갈수록 상처가 꽃이 된다는 믿음을 뿌리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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