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수박 / 이성복

샌. 2011. 7. 16. 11:16

여름날 오후 뜨거운 언덕바지를 타고 아파트로 가는 길엔 어른이나 아이나 제 머리통보다 큰 수박 하나씩 비닐끈에 묶어들고 땀 흘리며, 땀 닦으며 정신없이 기어오른다 그들이 오르막길에서 허우적거릴 땐 손에 달린 수박이 떼구르르 구를 것도 같고, 굴러내려 쇠뭉치로 만든 공처럼 땅속 깊이 묻혀버릴 것도 같지만 무사히, 무사히 수박은 개구멍 같은 아파트 현관 속으로 들어간다

그럼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선 끈에 묶인 수박을 풀고 간단히 씻은 다음, 검은 등에 흰 배의 고등어 같은 부엌칼로 띵띵 부은 수박의 배를 가르면, 끈적거리는 단물을 흘리며 벌겋게 익은 속이 쩍, 갈라 떨어지고 쥐똥 같은 검은 알이 튀어나온다 그러면 저마다 스텐 숟가락을 손에 쥔 아버지와 할머니, 큰아이와 작은놈, 머리를 뒤로 묶은 딸아이가 달려들어 파먹기 시작하고, 언제나 뒤처리 하는 어머니는 이따금 숟가락 집어 거들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입맛이 없다

어느새 수박씨는 마루 여기저기 흩어지고 허연 배때기를 드러낸 수박 껍데기가 깨진 사기 접시처럼 쌓일 때, 아이들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할머니는 건넌방에 드러눕고 아버지는 값싼 담배를 붙여 물고, 게으르고 긴 연기를 뿜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여름 어른들이 겪었다던 물난리 같은 것일까 질퍽하고 구질구질한 난장판 같은 것일까 아버지의 작업복을 기워 만든 걸레로 마룻바닥을 훔치며 어머니는 바닥 여기저기 묻어 있는 수박물을 볼 것이다 벌건, 그러나 약간은 어둡고, 끈끈한 수박물을...... 왠지 쓸쓸해지기만 하는 어떤 삶을......

                       - 수박 / 이성복

아름답고 정겨운 것과누추하고 비루한 것이 함께 있는 게 삶이다. 아름답고 정겹게 보이는 풍경의 이면까지 볼 수 있어야 삶의 진실에 가까이 가는 거다. 겉모습을 전부로, 또는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반쪽짜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가짜 아름다움에 속는 것이다.

창 밖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내 귀에는 나를 위해 불러주는 고운 노랫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짝을 찾거나 새끼에게 줄 먹이를 구하기 위한 고단한 비명일 수도 있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새는 그저 지저귈 뿐인지 모른다. 중요한 건 사물에는 내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다양한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웃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시원한 수박을 함께 먹는 가족의 모습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고단하고 쓸쓸한 삶을 드러낸다. 내가 편하고 달콤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 그걸 보는 일이 불편해서 우리는 애써 외면한다. 아이들은 뛰쳐나가고, 할머니는 드러눕고, 아버지는 담배를 문다. 가부장제의 전통적 질서에 의문에 제기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일상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이 시는 장마철에 방안으로 들어온 흙탕물처럼 축축하다. 진실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