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 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각하며 절합니다.
이 세상 처음 올 땐
인연 따라 온 것일뿐
산 속이든 물 속이든
돌고 도는 순리인즉
한 목숨
누리며 살 때
멈출 자리 봐 둘 일
제 사 배, 나의 진정한 얼은 어디에 있나 생각하며 절합니다.
하늘 뜻 새기는 일
먼 산보며 깨닫는다
땅의 뜻 다지는 일
길 가면서 되새긴다
늘 깨어
바라보는 일
쉬지 않는 이유다
제 십오 배, 하나의 사랑이 우주 전체에 흐르고 있음을 생각하며 절합니다.
달빛을 사랑한 별이 작은 눈을 끔벅이면
한 줄기 바람결이 풍경을 깨우도다
부처도 그윽한 웃음으로
달빛 별빛 모으신다
누구라 해탈한 듯 산속 절집 찾아오고
노스님 죽비 후려 새벽 군불 지피는데
선잠 깬 동자승 혼자
뒤척이며 찾는 엄마
제 십구 배, 생명의 샘물과 우주 뭇 생명의 기운이 내 안에 살아있으니 절합니다.
내 마음 가 닿은 곳
꽃이 피고 새가 운다
내 손길 가 머문 곳
열매 맺고 뿌리 벋고
내 목숨
끝자락에서
꿈 씨앗이 맺힌다
제 삼십이 배,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절합니다.
엎드려 절 받기도 그쯤이면 멈춰야지
한 시절 누렸으면 이쯤에선 내려야지
나무도
가을이 되면
겉 옷 따윈 벗더라
제 오십 배, 행복, 불행, 탐욕이 내 마음속에 있음을 알려고 절합니다.
부뚜막의 소금은 그저 하얀 알갱이일 뿐
내 몸이 겪어야만 길흉화복 되는 것을
앞다퉈
마음 쓸 일이
무에 그리 급하랴
오는 걸음 막지 않고 가는 옷깃 잡지 말며
웃음에는 웃음주고 눈물이면 닦아주며
하루치
땀냄새로만
내 업장 닦을 일
제 오십오 배, 인내는 자신을 평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아 절합니다.
중불로 끓여가는 곰탕 국물 허연 빛깔
시래기 익어가는 육개장 씹는 맛도
참는 게 이기는 거라고
반나절을 끓었다
내뱉지 못한 말이 부글부글 기어올라
걷어낸 웅얼거림 열이 식어 붉어질 때
그때 사 휘파람으로
시원하다 뱉으리
제 육십오 배,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모시려 절합니다.
한두 끼 주린 배는 냉수로도 채운다만
가난을 업으로 지고 평생을 견디어 가면
하늘이 노랗다 못해
땅도 꿈틀 일어선다
제몫의 뼈를 깎고 모서리를 맞춰가는
일용직 땀방울이 부익부를 일구어도
사리는 뻣속에 스며
미소 한 줌 지니리
제 팔십이 배, 생명을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임을 알고 느끼며 절합니다.
얼마나 숨 죽였으면
얼마나 그리웠으면
젊음은 초록이었으되
늙음은 갈맷빛이라
민둥산
억새밭 위로
흘러가는 저 인파
제 백팔 배, 이 모든 것을 품고 하나의 우주인 귀하고 귀한 생명인 나를 위해 절합니다.
나 있음에 네가 있고
너와 같이 이만큼 왔다
저 하늘은 오늘토록
나와 나를 감쌌으니
환생의 그날을 위해
맑게 혼백을 씻으리
- 최상호 시조집 <백팔배를 올립니다> 중에서
친척 형이 새로 나온 시조집을 보내주었다. 형이 펴낸 다섯 번째 시조집이다. 제목이 <백팔배를 올립니다>인데, 하나의 주제 아래 제 일 배부터 백팔 배까지 백여덟 편의 연작 시조가 실려 있다. 시를 빚어내는 형의 역량이 일취월장하는 듯하여 반가웠다.
형은 중학교 1년 선배다. 머리 모양 때문에 안 보는 데서는 짱구형이라 불렀는데 그때도 글을 잘 쓰더니 종내는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벌써 다섯 번째 작품집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몇 해 전에 명퇴를 했는데, 후년으로 갈수록 작품 활동이 점점 왕성해지는 것 같다. 책을 일독하며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몇 편 골라 보았다. 성찰하고 돌아보는 마음가짐이 맑다. 동시에 애써 정진하는 형이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나마 새 시집 발간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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