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시장 앞
날마다 횡단보도를 지키는 할머니의 좌판에서
능금 한 봉지를 샀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를 꺼내 한 입을 베어 문 것뿐인데
갈라진 씨방 속에는 벌레 한 쌍이 신방을 차려놓았다
엄동설한에
어렵게 얻은 셋방일 터인데
먹고 사는 일에 눈이 멀어버린 나는
남의 속사정도 모르는 불청객처럼
단란한 신방 하나를 훼손해 버렸다
- 능금 / 김환식
시인의 마음씨가 따스하다. 사과 대신 능금이라고 한 것도 정겹다. 지금은 능금이라는 말을 거의 안 쓰지만 어릴 때는 사과가 아니라 능금이라고 불렀다. 시인은 굳이 시장 앞 할머니의 좌판에서 능금을 산다. 흠집이 있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일 게다. 한 입을 베어 무는데 속에서 벌레가 나온다. 뭐, 이런 사과를 팔았나,원망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벌레의 신방을 훼손했다고 시인은 미안해 한다. 벌레를 단순히 미물로 대하지 않는 시인의 갸륵한 마음이 전해진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할 수 있다.
지옥과 천국의 식탁 이야기가 있다. 지옥이나 천국이나 똑 같이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는데,먹을려면 사람 팔보다 긴 젓가락을 써야 한다. 지옥에서는누구나 자기 입에 먼저 음식을 넣으려고 애를 쓰지만 먹지도 못한 채 굶어 죽어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긴 젓가락으로 서로의 입에 넣어줌으로써 사이좋게 잘 먹고 지낸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이곳 역시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다. 서로가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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