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없는 날에도 햇빛은 투명하고 고바우 슈퍼는 문을 열고 우체국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꽃은 피어 바람은 불고 강물은 제 갈 길로 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병원과 약국과 술집과 터미널이 붐비고 붐비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마루는 빗자루와 걸레의 애무를 받고 의자 위로 두툼한 엉덩이들이 내려앉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연못의 물고기들은 은빛 지느러미를 흔들거리고 촛불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깜빡거리고 먼지도 눈을 뜨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시장에선 배추와 무와 하지감자가 바구니 속으로 담기고 돼지와 소들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나가고 알몸둥이의 닭들이 펄펄 끓는 기름솥 속으로 투신을 하고 비듬나물과 상추와 풋고추와 옥수수와 멍게, 해삼, 오징어들이 좌판 위에 진열되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여관은 후문이 더 발달하고 별은 왼쪽 눈썹을 가늘게 뜨고 갈대는 오른쪽 갈비뼈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배는 통통거리고 비행기가 뜨고 내리고 자동차는 눈을 치켜뜨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농약은 뿌려지고 잡풀은 뿌리째 뽑혀 이사를 가고 노을은 늘 제 뒷모습만 보여주는데
그대가 없는 날에는 편지가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오고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차가 계속 질주하고 뒤로 넘어졌는데 배꼽에 금이 가고 눈도 안 오고 구름이 수상하고 약국이 문을 닫고 당직의사는 술에 취하고 그대가 없는 날에는 별도 보이지 않고 바람은 기관지염에 걸리고 강물이 간이 다 녹아 죽은 짐승이 떠내려가고 음악은 쿨럭거리고 수도관이 파열되고 가스가 떨어지고 이유없이 전기가 나가고 전화는 불통이고 꼴짐이 뻐그러지고 새끼소는 달아나고 어린애는 칭얼거리고 설사는 속옷을 누렇게 물들이고 그대가 없는 날에는 불심검문에 걸리고 압류영장이 발부되고 지갑을 잃어버리고 따귀를 맞고 타이어는 펑크가 나고 나사가 헛돌고 거푸집이 무너지고 화분이 말라 시들고 하품만 나오고 그대가 없는 날에는 후텁지근하고 끈적거리고 무좀균이 극성을 부리고 구두 뒷굽이 떨어져 나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는 황소 뒷발에 채이고 억새에 눈 찔리고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가고 반찬은 왕소금맛이고 자장면 배달이 늦고 보일러가 고장이 나고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고 마늘 값과 주식이 일제히 폭락을 하고 대출이자만 불어나고 그대가 없는 날에는 말도 시들하고 글도 죽고 정신도 죽고 그대가 없는 날에는 춥고 메마르고 올 것 같은 봄은 영 오지 않고
- 시마(詩魔) / 유용주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유 시인의 글은 시보다 산문이 더 맛깔스럽다. 시라 할지라도 이런 산문시가 낫다. 시인의 글은 직접적으로 체험한 밑바닥 삶에서 나오는 진정성과 힘이 있다. 그것이 아무래도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시보다는 산문에 어울리는 것 같다. 쓸쓸하고 서럽고 애처로웠던 것들을 풀어내는데는 사설조의 형식이 어울리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이 시는 <은근살짝>이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른 좋은 시도 많지만 이 시를 고른 건 시인의 화려한 말솜씨가 어지러울 정도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의반복의 리듬도 재미있다. 그런데 제목이 '시마(詩魔)'인 걸 보니 시인에게 '그대'는 바로 '시'를 말하는 것 같다. 시가 없어도 세상은 눈 한 번 깜박 하지 않고 잘 돌아가지만, 시인에게서 시는 세상의 전부다. 밥 한 끼 안 먹어도 끄덕없지만 시가 없는 세상은 엉망진창이 된다. 그러고 보면 시인이란 시마에혼을 앗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에게도 그런 '그대'가 있는가. 그것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나의 '그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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