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 고영

샌. 2011. 10. 18. 08:01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에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줄 수만 있다면

반짝이는 눈물도 말랑말랑

시린 꿈도 말랑말랑

 

     -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 고영

 

이 시의 매력은 '햇발국수'라는 조어다. 햇발과 국숫발을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햇발'은 사방으로 뻗은 햇살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햇살이나 햇발 모두 따뜻한 말이지만 시인이 만든 '햇발국수'는 애처로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준다. 이 시에 나오는 소년은 외로워 보인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형은 감옥에 갔고, 엄마는 돈 벌러 장터에 나갔다.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으면 따스한 겨울 햇살을 쬐며 국수를 연상했을까. 그러나 햇발국수라는 말 속에는 유년의 동화 같은 따스함이 있다. 가난하고 배 고팠지만 마음까지 궁핍하지는 않았던 시절이 햇발국수를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하는 소년의 마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을비 그친 뒤 어제는 햇살이 환했다. 맑은 하늘아래 청명한 대기 속을 햇볕 맞으며 걸으니 보약이 따로 없었다. 시인의 햇발국수가 또 다른 의미로 감사하게 다가왔다. 오늘은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봐야겠다. 따스한 햇발국수에 구수한 바지락칼국수 한 그릇 말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