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에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줄 수만 있다면
반짝이는 눈물도 말랑말랑
시린 꿈도 말랑말랑
-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 고영
이 시의 매력은 '햇발국수'라는 조어다. 햇발과 국숫발을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햇발'은 사방으로 뻗은 햇살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햇살이나 햇발 모두 따뜻한 말이지만 시인이 만든 '햇발국수'는 애처로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준다. 이 시에 나오는 소년은 외로워 보인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형은 감옥에 갔고, 엄마는 돈 벌러 장터에 나갔다.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으면 따스한 겨울 햇살을 쬐며 국수를 연상했을까. 그러나 햇발국수라는 말 속에는 유년의 동화 같은 따스함이 있다. 가난하고 배 고팠지만 마음까지 궁핍하지는 않았던 시절이 햇발국수를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하는 소년의 마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을비 그친 뒤 어제는 햇살이 환했다. 맑은 하늘아래 청명한 대기 속을 햇볕 맞으며 걸으니 보약이 따로 없었다. 시인의 햇발국수가 또 다른 의미로 감사하게 다가왔다. 오늘은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봐야겠다. 따스한 햇발국수에 구수한 바지락칼국수 한 그릇 말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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