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재무

샌. 2010. 9. 9. 17:28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닷물에 텃밭 떠난 배추 같은 생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얻어 타고 먼 바다 휭, 하니 돌다 왔으면,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를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재무

 

동기 H가 마음에 든다며 이 시를 소개해 주었다. 남자들 마음속이야 다 비슷하지 않은가. 이번에 퇴임을 한 선배도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퇴임 전에는 한 달간 잠적할 생각도 했었지. 마누라에게도 비밀로 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어." 얌전한 선배에게도 숨겨둔 여인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류의 도피 심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열심히 군말없이 살아온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도, 뭔가 반항의 몸짓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내가 그동안 잘 살아온 걸까, 하는 회의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래, 이런 걸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하지.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모든 것 팽개치고 그냥 휭, 떠나버리고 싶어진다. 세상은 잘난 너희들끼리 지져먹든 볶아먹든 마음대로 하고, 남도의 바다 끝 작은 마을로 들어가리라. 마량, 이름도 그럴 듯해라. 거기서는 해야 될일은 잊어버리고,짐과 의무감은 벗어던지고, 나는 케세라세라를 노래하리라.

 

그러나 실제로 '돌격 앞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마량은 그저 꿈속에서나 그려볼 뿐이다. 늙어서 푸대접 받지 않으려면 마누라 눈치, 자식 눈치 보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결국 선배도 나중에는 이렇게 말했다. "허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오늘은 나도 남쪽 바다 끝 마량 마을이 그리워진다. 일은 자꾸 꼬이고, 더구나 비마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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