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풀나라 / 박태일

샌. 2010. 9. 19. 07:28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젖쟁이 노랑쟁이 나생이 잔다꾸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파도밭을 담장으로 삼고 사는 나라

예순 아들이 여든 어머니 점심상을 차리고

예순 젊은이가 열 살 버릇대로

대소사 상다리 이고 지는 마을

사람만 봐도 개는 굼실 집 안으로 내빼

이름 잊혀진 채 그저 풀로만 불리는

강바랭이 씀바구 광대쟁이 독새기

이장 댁 한산 할배 마을 회관 마룻바닥에

소금 전 양 등줄 꺼지게 누운 마을

토광 옆 마늘 종다리는 무슨 힘으로

아침저녁 울컥벌컥 잘도 돋는데

한때 마흔 이제 스무 집 어른들

집집 다 버리고 마을 회관 두 방

문지방 내외하며 자고 먹는 풀나라

굴 양식 뜰것이 아침마다 허옇게

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바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 풀나라 / 박태일

 

추석 귀성 행렬이 시작되었다. 올 추석은 앞뒤로 쉬는 날이 많아 어제 고속도로는 평일처럼 한가했다 한다. 하기는 추석 4일 전부터 내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싶다. 조용할 때 미리 성묘를 다녀오려는 사람들, 또 놀러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둘째도 싱가포르행 비행기표를 겨우 구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에게 옛 농촌의 정서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시 제목인 '풀나라'는 낭만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예순 살이면 청년으로 불릴 정도로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이제 그분들마저 뜨고 나면 농촌은 말 그대로 풀나라로 변할지 모른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라는 정중한 물음이 죽비처럼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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